인터넷에서는 현실세계보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지역감정이 훨씬 심하다. 전라도는 특히 전라도의 전국적인 이미지가 나빠진 것이 전적으로 경상도 탓이라고 주장하며 집요하게 경상도, 특히 대구경북에 대한 욕설에 매달린다. 그래서 인터넷에 대구경북이나 부산경남에서 조그마한 사건이라도 하나 일어나면 환장을 하고 떼거지로 달려 들어 욕설과 비난을 쏟아 댄다. 경상도 이미지를 나쁘게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인 듯하다. 특히 대구경북에 대한 비난이 극심하다.
이런 인식을 가진 전라도인들이 인터넷에 퍼뜨리는 글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경상도의 가장 큰 죄악성 그것은 호남인들의 인간성을 건드린 죄악성이다. 이것은 거의 반인륜적인 범죄다. 사실 경상도 입장에서 호남 이외의 사람들을 통치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런데 끝까지 영남패권주의에 도전한 세력은 호남이었다... 급기야 영남패권주의자들은 해서는 안될 짓을 저질렀다. 그것은 호남의 인간성을 먹칠하고 왜곡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조직적으로.......경상도 주도의 36년간, 이러한 호남에 대한 이미지 조작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더구나 약자의 입장에서 함께 도와 주어야 할, 경상도를 제외한 팔도 사람들이 그 이미지 조작에 합세하고, 강자인 영남 편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정말 그럴까? 정말 영남은 막장까지 가서 전라도의 인간성을 조직적으로 극악하게 매도했고 전국의 다른 모든 지역은 거기에 하나같이 입다물고 동조한 비겁한 인간들이었던 것일까?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을까?
함부로 지레짐작이나 상상으로 없는 말을 지어 내 유포하는 것만큼 나쁜 짓도 드물다. 이런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자기 입맛대로 함부로 지어 퍼뜨리는 더러운 사기질에 불과하다. 전라도의 이미지는 경상도와는 전혀 무관하게 조선시대 또는 1950년대 이래 이미 전국적으로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특히 전라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던 서울 지역에서 극도로 나빴다. 이는 여러 자료를 통해 매우 명백하게 증명되는 사실이다. 전라도의 이미지가 전국적으로 나쁜 것은 경상도나 영남 정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전국의 다른 지역이 영남이 주도하는 전라도 매도에 동참했다는 주장은 하등의 근거 없는 완전한 날조 사기질에 불과하다.
사실은 사실대로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아래에 몇 가지 자료를 제시한다.
<팔도인 성격에 대한 선입관념>
(1958년 여론조사)
이 자료는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이진숙이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58년 6월~9월 사이에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이다. 여론 조사의 대상자들은 남자대학생 238명(서울 문리대,상대,외대생), 여자대학생 160명(이대생), 사병 209명(각 부대의 사병), 장교 148명(각 부대의 장교) 이상 모두 755명이었다. (아래 사진 오른쪽)
1000명 가까운 피실험자이니 당시로서는 대단히 대규모로 여론조사가 이루어 졌던 셈이다. 이진숙은 이 조사 결과를 사상계1959년 12월호에 <팔도인 성격에 대한 선입관념>이란 제목의 논문으로 게재했다. 영남 정권이 들어서기 전에 이렇게 전국적인 지역 이미지 조사를 한 자료는 흔하지 않다. 이 결과는 영남정권과는 완전히 무관하며, 많은 점을 증명해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자료에서 이진숙은 일단 조선후기(1751년)에 저술된 팔역지 75면에 실린 각 지역의 이미지에 대한 결과를 서두에 싣고 있다. 조선시대 이래의 이 전통적인 이미지에 변화가 있는가 하는 점도 조사의 한 관심사였다. (위 사진 왼쪽)
경기도 사람은 조폐 (凋 시들 조, 弊 폐단 폐),
충청도 사람은 전추세리 (專 오로지 전, 趨 쫓을 추, 勢 권세 세, 利 이로울 리),
전라도 사람은 교험 (狡 교활할 교, 險 음험할 험)
경상도 사람은 질실 (質 성실할 질, 實 실질 실),
강원도 사람은 협맹다준 (峽 골짜기 협, 氓 백성 맹, 多 많을 다, 蠢 어리석을 준),
황해도 사람은 영폭 (獰 모질 영, 暴 난폭할 폭),
평안도 사람은 순후 (淳 순박할 순, 厚 두터울 후),
함경도 사람은 경한 (勁 굳셀 경, 悍 사나울 한)
전라도의 이미지- 간사하다
1958년 이진숙의 조사 결과에 나타난 전라도의 이미지는 다음과 같았다 (기타 미미한 %를 차지한 결과는 생략).
남자대학생.... 간사하다(68.1%) 인색하다(21.9%)
여자대학생.... 간사하다(64.4%) 인색하다(18.1%)
사병... 간사하다(48.3%) 깍쟁이다(16.3%)
장교... 간사하다(64.9%) 사교적이다(20.3%)
조사에 참여한 총 인원 755명 중 남자대학생 162명, 여자대학생103명, 사병 101명, 장교 96명 등 총 462명(61.1%)이 전라도 사람을 간사하다고 평가했다. 그 뒤를 잇는 이미지도 역시 부정적인 것인 "인색하다" 였는데, 136명(18.0%)의 참여자가 이렇게 평가하였다. 1위인 간사하다는 평과는 꽤나 차이가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것이었다. 다른 이미지들은 미미할 뿐이다. 압도적인 숫자의 참여자들이 전라도를 간사하거나 인색하다는 등 부정적으로 평하고 있었다.
경상도에 대한 평가는 이러했다.
남자대학생.... 무뚝뚝하다(54.6%) 의지가 굳다(17.2%)
여자대학생.... 무뚝뚝하다(64.4%) 고집이 세다(18.1%)
사병... 무뚝뚝하다(62.7%) 남성적이다(20.1%)
장교... 무뚝뚝하다(67.2%) 고집이 세다(22.3%)
이진숙은 조사결과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전라도 사람은 간사하다. 남대생 여대생 사병 장교의 이 특성에 대한 선택률은 각각 68% 64% 48% 64%로 되어 있다. 이 외에 25% 이상의 선택률을 가진 특성이 하나도 없다. 이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전라도에 대하여 간사하다는 선입관념을 가지고 있는 까닭이라고 하겠다.예전부터 운위된 교활한 전라도 사람은 지금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입 끝에 오르고 있다.
경상도 사람은 무뚝뚝하다. 한가지 특성으로 평가되는 점에서는 전라도 사람과 같다. 54% 64% 62% 68%의 남대생 여대생 사병 장교가 즉 그들의 과반수가 그들을 무뚝뚝하다고 판단하였다. 진실하다는 옛날 평가는 해당되지 않는 것 같다. 선택률을 무시하고 볼 때에는 전연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무리한 해결은 하지 않겠다.>
전라도나 경상도나 지금의 평가와 사실상 동일함을 알 수 있다. 지금도 경상도는 무뚝뚝하고 고집 센 사람들로 알려져 있고 전라도는 간사하며 믿기 힘든 사람들이란 평을 받고 있다. 이 점 분명하다. 전라도는 자신들이 좋을 때는 매우 좋다가 뒤끝이 상당히 좋지 못하다는 부정적인 편견 때문에 매우 큰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이 점은 다른 이유는 전혀 없고 오로지 경상도 탓이라고 몰아 대고 있다.
그러나 이 조사 결과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전라도에 대해서 도대체 누군가가 작위적이며 인위적으로 무슨 악의적인 평가를 덧칠해서 오늘날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보기에는 대단히 무리가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영남 정권이 들어서기 전인 50년 전 여론 조사 결과도 지금과 사실상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 외의 지역 사람들에 대한 평가도 지금과 대단히 유사하다.
각 지역의 대표 이미지는 이렇게 정리되어 있다.
"서울사람은 깍쟁이고 간사하고 사교적이고 경우가 밝다.
경기도 사람은 온순하고 깍쟁이다.
충청도 사람은 온순하고 예의가 있고 보수적이고 완고하다.
전라도 사람은 간사하다.
경상도 사람은 무뚝뚝하다."......
여론조사결과 총평
이진숙은 이 여론조사의 총체적인 결론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이 부분도 큰 의미가 있다.
<<우선 첫째로 서울과 전라도의 두 지역 사람의 성격이 서로 유사한 점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라도의 인색한 성질을 제외한 기타의 특성이 그대로 서울사람의 성격적 특성으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깍쟁이고 간사하고 사교적이고 영리한 점에서 서울사람 전라도 사람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둘째로 서울, 경기, 충청의 세 지역 사람은 예의가 있다. 예의는 교양을 의미하고 따라서 이 지역 사람들의 교양이 높이 평가되어 있다고 하겠다.
셋째로 온순하고 성실한 특성은 경기, 충청, 강원, 황해의 사도인에 대한 선입관념이다. 이 사도지역은 대체로 우리나라의 중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중부지방 사람들의 공통된 특성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강원도 사람들도 역시 비슷하다. 남부의 전라도나 경상도, 한반도 북부의 함경도나 평안도는 예나 지금이나 온순하다는 평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넷째로 황해, 평안, 함경의 3도로 들어가면 대부분의 남한인에게서 볼 수 없는 새로운 특성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활동적이고 의지가 굳고 생활력이 강하다는 등등의 특성이 그 지역 사람들에게 나타난다. 이러한 여러 가지 특성은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의지적 인자가 주로된 특성이라고 하겠다. 이런 특성에 대한 평가는 경상도를 제외한 남한인에 대해서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황해도는 그 특성으로 보아 중부와 북부의 두쪽에 걸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평안, 함경의 양도인이 거칠은 것은 예의있는 서울, 경기, 충청의 삼도인의 성격과 대조되는 특성이다. (북한인은 의지가 굳고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고 남한인들 중에는 유독 경상도만 그러했다)
끝으로 다섯째는 경상도의 인심이 남한의 다른 지역보다는 평안, 함경의 북한인심과 공통된 점이 많은 것은 흥미있는 현상이다. 무뚝뚝하고 의지가 굳고 고집이 세고 남성적인 성격은 그대로 평안도나 함경도 사람의 특성인 것이다.(경상도는 북한인들과 비슷하게 의지가 굳고 남성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경상도 사나이라는 말이 박정희 시절에 어거지로 만들어진 소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경상도는 625 때 가장 많은 지원병을 내 보냈으며 가장 많은 625 전쟁 영웅들을 배출한 곳이다. 625 호국인물 100인으로 국가보훈처가 지정한 전쟁 영웅들의 지역별 분포를 보면(자료; 국가보훈처)
경상도 26(대구경북 16, 부산경남 10), 서울 17, 인천경기 9,
전라도 12(광주전남 8, 전북 4), 충청도11(대전충남 6, 충북 5), 제주 4,
함남 4, 함북 2, 평남 7, 평북 2, 황해2, 중국 1, 기타 출신지역 미상 3 등이었다.
이 조사가 이루어진 시점은 50년 전인 1958년으로서 625가 종전된지 겨우 5년이 되는 시점이었다.
625를 겪을 당시 전국민이 보고 느낀 이미지가 조사 결과에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는 시점이었다. 경상도 사람들이 무뚝뚝하다는 말은 역사적으로 이 조사에서 처음 나타난다. 팔역지 75면에는 검박하고 성실하다고 되어 있었다. 625 당시 전쟁터에서 겪은, 전란 중에 대구 부산으로 전국민이 피난을 가서 본 경상도 사람의 느낌이 조사결과에 반영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영남 정권 때문에 전라도의 이미지가 나빠졌다고 보기에는 이미 50년대에 전라도의 이미지가 지금과 다를 게 없었으며 그 평가 방식(간사하다 등)에 있어서도 지금과 사실상 동일했다.
전라도인들 스스로가 평가하는 자신들의 인성
그럼 당시 이 조사에 참여한 전라도 사람들은 자신들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전라도인들은 자기 스스로를 이렇게 바라 보고 있었다.
1. 영리하다(37.9%) 2. 간사하다(17.9%) 3. 고집이 세다(15.8%)
이에 대한 이진숙의 논평은 다음과 같다.
<전라도 사람은 자기네를 영리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먼저 번의 타인에 의한 평가는 간사한 사람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그것과 달리 영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전라도 출신들은 자기네를 깍쟁이고 인색하고 사교적이라고 평가하지 않았지만 약 17%가 간사하다고 평가하였다. 이것을 보면 자기의 출신 도에 대하여 반드시 좋은 선입관념만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전라도 자신들마저도 스스로의 인성을 그다지 좋게 평가하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들을 바라보는 두 가지 이미지인 영리하다와 간사하다를 엮으면 팔역지 75면의 "교활하다"란 이미지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시인 조영암의 필화 사건 (1959년)
1959년 강원도 고성출신 시인 조영암의 "하와이 근성 시비"라는 필화사건이 있었다. 조영암은 당시 잡지에 전창근이란 필명으로 "전라도는 간휼과 배신의 표상"이며, "우선 인류권에서 제외해야 겠고, 또 동포권에서도 제외해야 겠고, 이웃에서도 제거해야 겠고, 친구에서 제명해야 겠기에"운운의 지독한 글을 썼다가 잡지사가 폐간되는 등의 난리를 겪은 적이 있다. 간휼과 배신의 표상이란 건 그렇다 치고 인류권에서까지 제외해야 한다고 했는데, 공개적으로 출판된 글에서 저렇게까지나 했던 걸 보면 글을 쓴 사람은 전라도에 악이 받칠 대로 받치기라도 했던 것일까?
그러나 이 글은 조영암이 단순한 개인적인 견해를 생각나는대로 기고한 수필이 아니었다. 당시 폐간된 잡지사는 서두에서 한국사회의 10가지 현상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려볼 기획의도를 밝히고 있었고, 그 10가지 주제의 하나로서 소위 하와이 근성이라 불리는 전라도 사람들의 인성을 논해 보기로 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1950년대 당시 이미 전라도인에 대한 평판의 문제는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서 고찰의 대상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잡지사는 각 주제에 대해 시(그렇다)와 비(아니다)를 나누어 필자를 달리해 원고를 청탁했고 조영암의 글은 "시" 로서 기고된 것이었다. "비" 부분은 전라도 출신 유엽이 맡았다. 유엽은 1902년 10월 13일 전북 전주 출신으로서 전주 신흥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와세다대학 부속 고등학원에서 2년간 수학하였다.
당시 유엽이 민족문화 제4권 제8호(1959년 8월호)에 기고한 "개땅쇠의 변을 쓴 동기와 그 전문" 을 한 번 살펴 보기로 한다. 그 내용을 보면 당시 전라도에 대한 전국적 인식이 어떠했는지를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지금의 인식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전라도에 대한 인식은 좋지 못했다. 영남정권 때문에 전라도 이미지가 나빠졌느니, 그 탓에 어느 결혼정보회사에서 기피지역 1위가 전라도로 나왔느니 해도 지금이 오히려 양반이라 할 정도이다.
유엽은 당시 개땅쇠의 변을 잡지에 기고한 배경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종열씨는 나에게 아래와 같은 말을 했다. "...세간에서는 전라도를 몹시 악평을 하고 있고 또 요새와서는 <하와이>라고까지 야유들을 하니 단일민족인 우리로서 남북이 갈려져 있는 것도 원통한데 그러한 짓은 조그마한 도를 단위로 지방열을 고조시켜 민족단결에 암이 될 우려가 있으니 이번에 모씨(어데까지 익명이었다)에게 전라도 욕을 써도록(쓰도록) 할 터이니 선생은 그것을 반박하여 세간에 오해를 풀도록 해 봅시다..." 이 말은 결국 내가 전라도 변명을 써는(쓰는) 것이 주요 목적이오 전라도 욕을 써는 것은 내 글을 써이기 위한 발판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찬동하였다. 내가 어려서부터 고향을 떠나 객지로만 다녔는지라 전라도 외에 타도 인사들을 많이 교제하여왔다. 어찌된 셈인지 전라도 사람을 좋게 말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요새 와서는 전라도 본적을 타도로 옮긴 사람까지 생기게 되었다.>> (위 사진 오른쪽)
1950년대 이미 전라도에 대한 인식은 극도로 나쁜 상태였으며, 전라도 사람을 좋게 말하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고 그 탓에 전라도 사람들이 자신의 본적을 숨기려고 다른 지역으로 본적을 옮기고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여간해서 본적까지 세탁하지는 않는다. 당시 이미 전라도사람에 대한 전국적 이미지가 극도로 좋지 못했던 것이다.
유엽은 또한 이런 말도 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서울에 올라 와서 잔뼈가 굵었기 때문에 전라도에 대한 서울주민들과 타도 인종의 기질을 잘 알고 있다. 그 역사적 기원은 소상하게 밝힐 수는 없으나 우리 전라도 놈들에게 대하는 서울 주민들과 타도 인종들의 태도란 도리어 전라도놈인 내가 몸서리날 정도다. 워낙 전라도놈이 이중인격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중인격인 전라도놈을 상대하는 서울주민 및 타도인종들이 더 이중 삼중적인 데에 아니 놀랄 수 없었다. 그것은 우리 전라도 놈들을 대할 때에는 그네들이야말로 한자락 깔고 교제를 하고 있다. 그것은 그네들이 전라도관에 관한 선입주견이 그리되었기 때문이다. 동좌석을 하고 앉아서 놀다가도 이러서서 나가는 뒤꼭지에 손까락질을 하며 또하나 전라도놈 내가 남어있는 줄도 모르고 전라도놈 중상이 화제로 꽃을 피운다. 그러다가 내가 역시 전라도놈인 것이 깨닫게 되는 순간에는 "너는 전라도놈이지만 전라도놈은 아니다"라는 말로써 위무하게 된다.>> (위 사진 왼쪽)
1950년대에 서울 주민이나 다른 도 사람들은 전라도 사람에 대해 극히 나쁜 선입관념을 가지고 교제를 하고 있었으며, 유엽은 이런 서울 주민이나 타도 인종들에 대해 전라도인으로서 몸서리가 날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전라도에 대한 전국적 인식, 특히 서울시민들의 인식은 극도로 나빴고, 전라도에 대한 나쁜 선입견은 매우 뿌리 깊게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유엽은 전라도 출신으로서 타인의 신세를 지지 않고 살아 온 자신에게 타지역 사람들이 최고의 칭찬이라고 해 준 말이라는 것이 기껏 "너는 전라도 사람이 아니다"라는 것, 즉 당신은 다른 전라도 사람과는 다르다는 모욕적인 소리였다고 말하고 있다.
<<전라도놈에게 향하여 전라도놈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이 전라도놈에게 주는 최상의 찬사라고 할진대 전라도 놈에게 대한 우리나라 동포들의 저의에 잠복해 있는 선입적 잠재의식이란 그 어떻다는 것을 우리 전라도 놈들은 알아야 한다. 나는 내 자랑이 아니라 이날까지 서울 주민에게나 타도인종들에게 호말의 신세를 진 일이 없다. 도리어 내 것을 주고 왔다고 함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날까지 한끝 해야 들어온 찬사라고는 먼지만한 "너는 전라도 놈 아니다"라는 모욕적 찬사다.>> (위 사진 오른쪽)
유엽은 오히려 베풀면서 살아 온 자신에게 타 지역 사람들이 최고의 칭찬이랍시고 해 주는 말이 기껏 다른 전라도 놈과 다르다는 소리였다고 말한다. 전라도 사람들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좋지 못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글은 1959년도에 쓰여졌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고,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전라도의 이미지가 나쁜 것은 영남이나 영남 정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전라도는 요즘들어 경상도를 핑곗거리로 삼을 건덕지가 생겨서 오히려 좋을런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는 참으로 얼토당토 않은 말도 안되는 억지이다. 어거지도 이런 어거지가 없다. 솔직히 말해, 도대체 역사적으로 전라도의 이미지가 좋았던 적은 사실상 없다.
유엽은 전라도가 민족사적으로 푸대접을 받는 점에 대해 이런 말도 한다.
<<전라도놈이 우리 민족사에서 푸대접을 받을 만큼 나쁜 것은 잘나서 그랬건 못나서 그랬건 별문제로 하고 하여간 그 으뜸인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렇다면 그와 반대로 착하기는 으뜸가는 도거나 도 전체가 못된다면 하다 못해 시거나 읍이거나 면도 좋으니 하나쯤은 내세워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알고 듣기에는 흠이 없고 착하기로 으뜸가는 곳은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나라 이 민족에게는 선근종자(善根種子)란 그야말로 멸종이 되었다는 말인가? 이 민족은 착한 곳은 찾을 생각을 않고 나쁜 곳만 찾으려고 애를 써 왔다는 말인가?>> (위 사진 왼쪽)
유엽은 전라도가 민족사에서 푸대접을 받을 만큼 나쁘기로 으뜸이기는 하지만, 그렇다면 흠 없이 착한 도나 시읍은 도대체 어디가 있느냐, 우리 민족은 착한 곳은 찾을 생각을 않고 나쁜 곳만 찾아 다니느냐는 항변을 하고 있다.
1950년대 당시에 영호남간에는 별다른 지역감정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전라도 사람들은 영남출신인 박정희가 516을 일으키자 몰표를 주었다. 오히려 서울 주민 등 전반적인 다른 지역 사람들이 전라도를 매우 싫어하고 있었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다.
전라도의 이미지는 영남정권이 들어 서기 전에도 지금과 마찬가지였고, 경상도에 대한 이미지 역시 지금과 거의 동일하고 기타 전국 각 지역의 이미지도 50년이 지난 지금과 사실상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어느 특정지역의 이미지가 일부 지역 사람들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것은 전국의 국민을 지나치게 바보취급을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자신들만 똑똑하고, 사리분별하고 사는 것이 아니다.
전라도인에 대한 서울 시민들의 시선(1960년대)
다음은 초졸 학력으로 검찰 사무관 승진시험에 7전8기로 합격한 전라도 출신 정병산씨의 이야기이다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715891).
*태어나신 고향은 어디시죠?
"정확히 전라남도 승주군 황정면 임산리입니다."
*서울에 내리셨을 때가 몇 년도였나요?
"그 때가 1967년이나 1968년, 그 사이일 겁니다."
*그럼 어디서 깨어나셨어요?
"누가 지팡이 같은 것으로 툭툭 건드린 것 같아서 눈을 떠보니까 하얀 두루마기에 갓을 쓴 노인 한 분이 저를 건드리신 거예요.... 그 때 불현 듯 생각난 것이 제가 이발소에서 머리 감겨주는 것을 배운 것이었어요. 그래서 이발소에 가서 머리감겨주는 일을 구해봐야겠다 생각하고 이발소를 가게 되었죠. 그런데 이발소에서 전라도 놈들은 도둑놈이라고 안 써주는 거예요. 그래서 대여섯 군데를 다녔는데도 전라도 사람이라고 취업이 안되는 거예요. 그렇다고 서울말 흉내를 낼 수도 없고, 몇 군데를 더 다녀봤더니 한 곳에서 한 번 들어와 보라고 하는 거예요."
*이발소 종업원 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설움도 참 많을 것 같아요.
"제가 이발소에 취직을 해서도 제가 전라도 사람이기 때문에 아직 마음을 못 놓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주민등록등본과 호적등본을 떼어 오라고 하더라고요."
도대체 왜 저랬을까?
1967년 무렵에 이미 전라도 사람에 대한 서울사람들의 불신이 극심했음을 알려 주는 경험담이다. 어째서 저랬던 걸까? 도대체 저게 경상도 탓일까?
전라도 분들은 그렇게 주장하고 싶어 할 것이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가 63년도에 집권하자마자 무어 할 일이 그리도 없었기에, 무슨 전라도에 대한 억하심정이 그리도 컸었기에, 만사를 제쳐두고 전라도 이미지 망치는 일에나 전력을 쏟았을까? 박정희는 63년에 전라도 몰표로 당선된 사람이다. 63년 10월 15일 치러진 516 직후 최초의 대선에서 박정희는 전북 44.1% (윤보선 37.0%), 전남 52.5% (윤보선 28.4%)를 얻는 등 호남에서 무려 35만 296표의 차이로 압승하여 윤보선에게 총 15만 6026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사람이다.
전라도는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그런 박정희가 64년 무렵부터 정권 잡자마자 한 일이 기껏 전라도 때려잡는 것이었으며, 그래서 그 탓에 이전에는 전국적으로 차별없는 대우를 받았던, 아니면 혹여 좋은 대우라도 받았던 전라도 사람이 불과 3~4년만에 서울 시내 이발소에도 취직하기 힘들 만큼 꺼려지고 불신받는 사람들로 변하게 된 것이란 말인가? 도대체 그런 것도 말인가?
전라도 말을 쓴다는 이유만으로 대여섯 군데를 다녀도 도대체 이발소에조차 취직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서울 시민들은 도저히 전라도 사람들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이며, 이 점은 단순한 정권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민중들의 마음 속에 하나의 현실로서 매우 깊숙히 내면화되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정답은 저것은 결코 그 어떤 남의 탓도 아니라는 것이다. 위 자료에서 보듯이 이미 조선시대나 1950년대 이래, 다른 어느 지역도 그렇지 않았지만 전라도는 홀로 전국적으로 극히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불편하더라도 진실은 진실이다.
전라도가 자신의 나쁜 이미지를 모조리 경상도로 돌리고 악담과 욕설을 퍼부어 대는 것은 터무니 없는 일이다. 외면하고 싶더라도 사실이라면 받아 들이고 인정할 줄 아는 정직함이 필요하다.
전라도 분들은 자신들의 이미지가 좋지 못한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다른 지역에 대하여 떼거지로 야비하게 욕질을 퍼붓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 아무리 타 지역을 주춧돌 삼아 자신들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벗어나고 싶더라도 얼토당토 않은 사람을 붙잡고 늘어져서는 안된다. 근거 없이 타인을 비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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