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3일 일요일

전라도 문제 바로보기 -秋-

지금까지 이글루스에서 나왔던 지역감정에 관한 글들은 대개 홍어라는 단어가 나쁜 이유만을 다루었고, 지역감정의 유래를 알아보고자 하던 글들은 거의 전무했다. 물론 지역감정의 유래를 추적하고자 했던 글들도 있었지만, 이 역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 후의 지역감정은 다루지를 못하고 있었다. 이러하다보니 논객들은 김대중 씨가 대통령이 당선되자 지역감정이 많이 해소된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난 이를 보완하고자 이번 글에서 김대중 씨 대통령 당선 후의 지역감정을 중점적으로 다루겠다.

1. 김대중의 삽질
97년 대선에서 이기기 위한 김대중의 노력은 그야말로 눈물겹고도 필사적인 것이었다. 김대중은 영남의 비토를 조금이라도 약화시키기 위한 일이면 무엇이든지 다 했다. 이것을 좋게 말하면 '김대중은 피눈물나게 영남을 짝사랑했다'는 것이었다. 김대중은 대통령직을 차지하고자 전노를 사면해서 전노와 김대중은 드림팀 트리오, 어제의 용사들, 한국의 3총사가 됐다. 대통령 취임 후 처음 청와대에서 가진 전직대통령 초청 만찬에서 전두환은 김대중의 백년지기, 천년동지처럼 아부를 하고, 노태우는 전폭적인 지지와 협조를 나발 불었다.
이게 과연 광주 학살의 주범들과 김대중이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인지 눈이 의심스러운 순간이었다. 반면에 김영삼은 두 학살 주범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김영삼이 그날 했던 말은 북한의 금강산도 좋지만 남한의 해금강이나 한려수도도 죽인다는 소리뿐이었다. 양 김 중에 누가 호남의 한을 상징하는 호남의 정치인인지 헛갈리는 순간이었다. 박정희는 김대중과 김영삼의 공통된 정적이었다. 두 김씨의 정치 역정은 박정희란 인물과의 투쟁의 역사였고, 공화당 혁명정권과 싸웠던 민주화 세력의 두 기둥이었다. 둘 중에 박정희가 오히려 호감을 가졌던 것은 김영삼이었고 김대중에 대한 박정희의 시각은 싸늘했다.
김영삼은 한번도 그의 정적이었던 박정희에 대해 호의적인 멘트를 한 적이 없다. 그러나 김대중은 박정희에 대한 흠모의 메시지를 수도 없이 보냈다. 대통령이 되자마자 김대중은 경북도청을 방문해서 박정희 찬송가를 불렀다. 낯뜨거운 칭송이었다. 김대중은 저녁 회식자리에서 박정희를 찬양하는데 너무 몰두해서 식사는 몇 숟가락 입에 넣지도 못했다. 이의근 경북지사하고 박지원 대변인이 양옆에 앉아 "지당하시옵니다 마마"하고 연신 맞장구를 쳤던 것은 불문가지다. 그리고 김대중 씨는 자기를 납치했다고 그렇게 까던 박정희 대통령을 기념하는 사단법인 박정희대통령 기념사업회의 명예회장을 맡았다. 동 사업회는 시민단체와 민주 세력들의 비판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99년 7월 26일 설립됐다. 회장은 신현확, 부회장은 권노갑, 김용환, 박근혜 3인이었다. 참으로 감개무량한 상전벽해의 한국 정치였다.
이게 과연 동서 화합이며, 지역감정의 치유책이었는지는 오늘날에도 해소되지 않은 호남지역의 몰표현상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호남인의 반응이다. 김대중이 전노를 풀어주고 셋이서 짝짜꿍을 하고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고 서로 죽고 못사는 사이가 되도 말이 없었다. 김대중이 박정희 기념사업회의 명예회장이 되어 양 손에 흰 장갑을 끼고 박근혜하고 나란히 서서 설립 테이프를 잘라도 "민주주의의 고향"이라고 그렇게 목소리를 드높이던 호남인들은 말이 없었다.
김대중의 변절과 배신, 농락과 우롱에는 무감각 전신마비증상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입만 열면 '군부 독재자들, 광주사태의 주범들'하고 영남을 비난한다. 그 비난은 이제 김대중한테 돌려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면 일체 과거를 묻고 이제는 그 소리를 꺼내지 말던가 해야지. 김대중은 전노를 풀어주면서도 호남에 자부심을 주지 못했고, 죽은 박정희한테 아부를 하고서도 지역감정 문제를 해결치 못했다. 오히려 호남을 전국적인 비웃음거리로 전락시켜 비참하게 만들었고 동서를 원수로 만들었다. 적을 용서해 주고도 명예를 회복하지 못하고, 원수를 끌어안고도 한을 놓지 못했다. 적은 적대로 풀어주고, 원수는 원수대로 웃게 만들고는 한은 한 대로 그대로고, 응어리는 엉어리대로 그대로고, 감정은 감정대로 그대로다. 시어머니한테도 욕먹고 며느리한테도 눈총 받는 꼴이다. 이럴 거면 뭐 하러 전노를 풀어주고 뭐 땜시 박통을 끌어안았는지 그 속을 알 수가 없다. 

2. 경상도의 반격
지금 호남인들이 '영남 정치인들이 선거에서 노골적으로 지역감정을 부채질했다'고 비난하는 근거가 되고 이유가 되는 선거 중 하나는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실시한 선거인 98년 4월 2일의 영남지방 재보궐 선거였다. 김대중과 호남정당이 87년 이후로 10년 동안이나 지역감정을 선거에 이용하고 난 다음이다. (통칭 호남정당이라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당명이 하도 바뀌어서 그 중 어떤 이름만으로 불러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평민당-->민주당-->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평화민주당 Reloaded) 
한나라당은 자기 텃밭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고 이때 노골적으로 지역감정에 호소했다. '호남사람이 정권요직을 독식하고 있다!' '호남정권이 영남 공직자들을 다 죽인다!' '호남은 흥청망청, 영남은 엉망진창!' 한나라당의 선거 구호는 왼통 자극적인 영남차별 성토 일색이었다. 과연 지역감정의 위력은 대단해서 이런 지역차별 성토 구호 앞에 다른 정책이나 노선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재보궐 선거에서 한나라당은 4개소에서 전승했다. 부산 서구 정문화, 대구/달성 박근혜, 문경/예천에 신영국, 의성에 정창화였다. 
김대중은 이 영남 재보궐 선거를 영남지역 교두보 확보의 절호의 기회로 보고 총력지원 태세로 임했다. 하지만 대구/달성 지역 필승의 카드로 선택한 엄삼탁도 박근혜한테 힘을 못 쓰고 무너졌다.  김대중의 영남 진출은 다시 한번 좌절됐다. 뼈아픈 패배였다. 만약에 재보궐 선거에서 국민회의가 단 한 석이라도 이겼다면 영남출신 의원들의 무더기 영입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한나라당 의원 중 많은 수가 탈당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재보궐 선거에서 영남사람들이 집권여당에 보여줄 호감의 정도를 눈치로 재고 있었던 참이었다. 그러나 국민회의와 자민련 후보의 일방적인 패배는 이런 탈당눈치파들을 모조리 주질러앉히고 말았다.
김대중의 정계개편 의도가 물 건너가는 순간이 됐다. 4.2 재보궐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압승을 거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호남정권의 정부요직 독점'이 영남 유권자들에게 심정적으로 먹혀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과연 '호남정권의 정부요직 독점'은 그 무렵 사실이었는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그 문제로 영남인들이 분노하여 몰표를 행사할만한 당위성이 있었는지 살펴보자.

3. 김대중의 단점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고 나서 처음 얼마동안 TV를 통한 '국민과의 대화'를 내보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 국민들의 반응이 별로 좋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이 '국민과의 대화'를 시도했던 것은 한마디로 언변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TV라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매체를 통해서 원하는 만큼 마음대로 국민들에게 말할 수만 있다면 국민을 설득하고 자기를 이해시킬 수 있다고 그는 믿었다. 그러나 김대중은 자신의 단점을 잘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진실성의 부족'이었다. 그의 '국민과의 대화'를 몇 차례 듣고 난 국민은 금방 어떤 감을 느끼게 됐다.
즉 말은 잘하지만 진실하지가 않다는 느낌이다. 솔직하지 않고 자꾸 꾸미고 가장하여 말한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 국민들의 감각은 보기보다 예리하다. 특히 진실성에 대해서는 예리하다. 이게 바로 김대중의 약점이다. 지역감정 문제도 겉으로는 그토록 애를 쓰는 듯이 보이고, 말로는 금방이라도 해결을 할 듯이 자신하면서도 실제로는 5년 동안 하나도 해결치 못한 이유가 지역감정에 대한 자신의 해결의지 자체가 진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편중인사의 불식이나 공정한 인사, 지역차별의 완화는 전부다 말뿐이었지 그것이 철학으로 승화된 속내가 아니었다. 녹화된 테레비 대담 몇 편만 보고도 국민들이 그것을 느끼는데 하루종일 모시고 있던 측근들이 그것을 모를리는 없었다.
즉 대통령의 속마음이 어떤 가를 가늠해서 눈치껏 건의를 하고 보좌를 한다는 뜻이다. 지역문제의 해결에 대한 의지가 김대중의 진심이고 속내이고 철학이라는 것이 측근들에게 전해지면 측근들은 그에 맞추어서 일을 한다. 그러나 인터뷰나 연설에서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실제로는 호남 편애, 호남 우선, 호남 신뢰의 속내를 측근들에게 보이면 측근들은 그에 맞추어서 인물을 추천하고 인사 보고를 올리게 마련이다. 지역 감정 문제가 김대중 치하에서 더욱 심화된 이유는 문제 해결의 의지가 그의 진심으로써 측근들에게 전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실제의 인사와 여러 정책들에서 여실하게 드러났다.
김대중은 말에 진실이 없다. 김대중이 하지 않는다는 말은 하겠다는 것이고, 한다는 것은 별 의지가 없다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역감정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해결할 의욕이 없다는 것이었다. 공정하고 편중되지 않은 인사를 김대중은 취임 초부터 기회가 있는 대로 다짐을 했지만 실제 인사는 그렇지가 않았다. 약속에 걸맞는 인사는 취임 후 첫인사뿐이었다. 그 후의 두 번째 인사부터 공정 인사는 꽝이 돼버렸다. '전라도냐?'가 인물발탁의 척도가 되어 버렸다. 김대중의 인사가 어떻게 변질되어 갔고 얼마나 쉽게 얼마나 빨리 호남패권주의로 바뀌어갔는지 지금부터 확인을 해 보자.

4. 김대중의 죄
호남문제의 시작은 '전라도 혐오증'이다. 이것이 전라도 사람들한테 준 상처와 모멸감과 피해의식은 타지방 사람들이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일 것이다. 이 전라도 혐오증의 원인으로 나는 두 가지를 꼽는다. 60,70년대 군대의 '전라도 고참의 공포'가 그 첫째요, 두번째가 이농현상에 따른 호남인의 타지 유입이 그것이다. 물론 호남-->서울/영남 이라는 단방향의 이동에는 소득격차와 교육격차, 취업기회의 격차라는 원인이 있었다. 두번째 이유에 의한 전라도 혐오증은 사실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전세계의 모든 산업국가가 초기의 산업화 과정에서 다 겪었던 문제고 다 발생했던 현상이다. 현재의 중국도 우리가 40년 전에 겪었던 일들을 지금 겪고 있다. 해안쪽 개방지역과 내륙쪽 농촌 지역간에 소득격차, 발전의 격차는 엄청나다. 우리보다 훨씬 심하다. 내륙의 농촌지역 사람들이 동부 해안의 도시로 육체노동 노예로써 유입되고 있다. 일자리를 얻지 못한 촌사람들이 거지, 노숙자로 고층빌딩 뒷골목에 나뒹굴고 있다.
산서, 협서 등지의 오지는 동부 해안지역에서 멸시받고 냉대받는 지역이 되고 있다. 그 지방 출신 전부가 도둑놈, 사기꾼들로 매도되고 있다. 그래도 그들은 도시로 도시로 몰려나올 수밖에 없다. 중국뿐이겠는가?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등 모든 산업국가가 산업화 시기에 겪지 않은 나라가 없다. 그러나 나중에 산업화가 완료되고 자본주의가 성숙되고 나면 도농간에 격차가 줄어든다. 오히려 선진국일 수록 농촌, 시골이 살기 좋게 변한다. 도시에서 전원생활을 찾아서 농촌으로 이주하는 역이농 현상이 생긴다.

이런 단계에 가면 산업화 초기에 발생한 지역 차별, 특정 지역에 대한 혐오감 같은 것은 자연히 소멸되고 옛날 이야기가 되고 만다. 다 잘 살게 되면 그런 얘기가 나올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의 지역감정은 왜 이렇게 심각하냐? 왜 그런 지역감정이 정치 자체를 결정짓고 선거만 하면 지역간 대결이 되고, 왜 대통령조차 되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는 상황까지 가고 마느냐? 그 이유는 김대중이란 사람이 지역감정을 자신의 개인적 야망의 성취에 이용했기 때문이다 라고 본다. 특히 그가 특정 지역 의원을 하나의 정당으로 몰아넣은 지역정당을 만든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김대중의 87년 대선출마와 평민당의 창당은 30년 민주화투쟁을 탈색시키고 민주화 세력과 독재세력을 혼합시키고 나라를 동서로 갈라놓은 망국적 행위였다. 특히 대통령 취임 후 5년 임기 동안의 잘못된 인사와 특정지역 독주로 인한 지역 분열과 독선적인 대북 접근정책으로 인한 이념적, 세대간, 계층간 분열과 혼란은 실로 나라를 누란의 위기로 몰아넣고 말았다.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 뒤 거의 10년 간 국민들의 마음과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전통적인 우방과의 관계는 삐걱거렸고 나라의 온갖 계층들이 무기력에 빠져들고 있었다. 나라 전체가 방향감각을 잃어버렸다. 이에 김대중과 그를 광적으로 지지했던 호남인들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호남인들은 알아야 한다. 물론 호남인들은 광주사태 등의 비극에 대해 군부정권에 죄송합니다 라고 해야된다는게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김대중은 김대중이라는 사람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나야 하고,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통해서 호남의 한을 해결할 수 있다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 호남이 바로 돌아와야 나라가 산다.
5. 당선 후 김대중의 행적
김대중 대통령은 당선되자 마자 지역 화합과 공정 인사를 위한 가시적인 조처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시작은 아주 그럴 듯 했다. 김대중이 영남우대 인사의 상징으로 줄곧 자랑하고 다닌 당선자 비서실장 김중권이 그 첫 번째였다. 김중권은 경북 울진 사람이다. 김대중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힘센 대통령 비서실장에 영남 사람을 앉혔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자랑을 했다. 기자들은 '좀 더 두고 보자'는 반응들이었다. 김대중의 후속 비서진 인선 과정을 보면 김대중다운 쇼맨쉽이 나오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일단 복수 후보자 명단을 발표했다. 즉 어떤 자리에 임용할 사람을 복수로 명단을 뽑아서 미리 발표하고 그 중에서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럴 듯 했다. 첫 복수 명단 발표는 청와대 비서진 후보들이었다. 이때의 명단을 보면 '과연!'하는 소리가 나올 만큼 극히 공정하다 못해 아예 지역별로 대가리 숫자를 정확하게 나눈 비서진 후보 명단이었다. 총 12명의 수석비서관 후보 중 서울/경기가 2명, 경남북이 3명, 전남북이 4명, 충청 1명, 이북(평북)이 1명이었다. 지역적 안배가 그런 대로 잘 이루어진 것 같았다. 막상 임용된 후를 보면 경남북 2명, 경기, 충청, 이북이 각 1명, 전남북이 3명이었다. 총 8명 중 호남이 3명이었다. 그러나 이 정도는 얼마든지 이해해 줄만했다. 비서실장이 영남인데 뭐. 
공직자 임용전 후보 복수 발표제는 김대중이 김영삼식 쇼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면서 내어놓은 회심의 인사정책이었는데 비서진 임용에 한번 써묵고는 두 번 다시 사용하지 않았다. 명단을 발표하자마자 온갖 루머들, 인신공격, 음해가 후보들에게 쏟아졌기 때문이고, 그 때문에 김대중까지 욕을 얻어먹었기 때문이다. 후보 복수 발표제는 김대중 대통령의 첫 시행착오였다. 자신만만하게 내 놓은 정치9단 대통령의 첫 작품이 내놓자마자 망가져 버렸다. 체면이 묵사발이 된 것이다. 이후 김대중은 김영삼보다 더한 깜짝쑈로 일관한다. 그 다음 쇼는 내각이었다. '국무총리 김종필' 이게 김대중 대통령의 두 번째 작품이다. 기가 막힌 걸작이었다. 국민들도 얼척이 없었고 야당인 한나라당도 기가 막혔다. 대통령 김대중에 국무총리 김종필이라니. 이는 Joker™씨의 웃음천국보다 한 차원 위의 희극이였다. 시키는 대통령이나 하겠다는 본인이나 그 밥에 그 나물이었다. 도무지 창피한 것에 대한 감이 없었다.

청와대 비서진들에게 임명장을 주는 자리에서 김종필 국무총리하고 한승헌 감사원장의 임명장을 같이 주기로 되어 있었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두사람에게 임명장을 주지 못했다. 한나라당이 임명동의안 처리를 보이콧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당시 국회의석은 총 299석, 한나라당이 160석이었다. 한나라당 의석은 동의안 처리에 필요한 과반수를 넘었다. 김대중은 속수무책이었다. 야당에 대한 앙심은 이때부터 김대중 마음속에 원한으로 자리잡았다. 결국 국무 위원들(장관)의 임명은 편법으로 전 국무총리인 고건의 제청을 받아 처리하고 김종필은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했다. 이때도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이회창은 은퇴한 상태였고, 한나라당 총재는 조순이였다. 이 초대 내각의 인선에서도 김대중은 지역안배에 엄청 고민을 했다. 그래서 장관 17명 중 호남 5명, 영남 5명, 충청 4명, 서울, 경기, 이북이 각 1명씩이었다. 얼른 보면 지역안배가 잘 된 것 같지만 철저하게 지역 갈라먹기식  내각이었다.
17명 중 공동정권의 지역인 호남,충청이 9명이었다. 영남은 대접을 받은 것 같은데 강원, 제주는 대한민국도 아니었다. 한국 인구의 절반이 사는 서울/경기가 합해서 2명이었다. 집권세력의 지지기반인 호남,충청이 1순위고, 괄세하면 악다구 해댈 것이 뻔한 영남이 2순위였고, 찬밥이라도 별 말이 없을 다른 지방들은 아예 대한민국으로 쳐주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이 인선을 김대중은 대단히 공정하고 지역별로 잘 안배된 공정 인사라고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내세웠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지역적 탕평인사라고 생각한 것이 바로 김대중의 지역문제에 대한 의식의 수준이었다. 지역 갈등의 해소가 고작 이런 차원의 지역안배로서 해결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사에서의 이런 유치한 지역안배는 지역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제스처에 지나지 않았다. 보여주기 위한 쑈로서의 안배지 진정한 해결의지의 구현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김대중의 속내와 지역문제에 대한 피상적이고 가식적인 열중은 뒤이은 모든 인사에서 갈수록 정체를 드러내고 말았다.
6. 정치9단 김대중
그런데 이 눈가리고 아옹하는 식의 지역 갈라먹기 내각으로 김대중은 이것이 지역안배형 내각인 것으로 국민을 속이는데 성공했다. 어쨌거나 영호남이 적대적인 관계였다는 단순한 사실만 가지고 균형잡힌 인사라는 감을 국민들은 받았던 것이다. 아니 김대중 정부가 이 정도에서 자제를 해준 것에 안도한 것인지도 모른다. 국민들 마음속에는 노골적인 호남 싹쓸이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반사적으로 김대중의 첫 조각은 후한 평가를 받았다. 내각 발표 후 여론 조사에서 '잘 되었다'는 긍정적 답변이 57%였다. 지역안배라는 측면에서의 공정성에 대한 질문에 대구/영남에서도 약 50% 가까운 긍정적 대답이 나왔던 것이다. 
내각 발표에 뒤이은 장관급 인사도 지역 갈라먹기 황금율을 충실하게 따랐다. 안기부장 : 서울(이종찬), 기획예산위원장 : 전북(진념), 여성특별위원장 : 이북(윤후정), 국무조정실장 : 경남(정해주), 금융감독위원장 : 외국 출생, 상해(이헌재), 한국은행 총재 : 전북(전철환), 공정거래위원장 : 전남(전윤철)이었다. 총 7명 중 호남이 3명이고 서울, 경남, 이북, 외국이 각 1명이었다. 역시 강원, 제주는 보이지도 않았다. 차관급 인사에 가서야 겨우 강원도 출신과 제주도 출신이 보였다. 차관급 인사에서는 총 39명 중 호남(광주/전남북)이 6명, 영남(대구/부산/경남북)이 9명, 대전/충청이 역시 9명, 서울/인천/경기가 역시 9명, 제주 1명, 강원 2명에 1명은 미정이었다.
공동정부의 한 축인 자민련의 위세가 곳곳에서 두드러졌다. 아무튼 공동정권의 지역인 호남과 충청이 어떤 인사에서든 과반수에 육박했다. 호남/충청의 전성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이와 같은데도 유독 서울, 경기, 강원, 제주 사람들은 일체 지역차별이나 지역감정에 의한 불만이나 불평이 없었다. 자존심이 없어서 그럴까? 우둔해서 그럴까? 이들 지역 사람들이 전라도 사람들과 같다면 민란이나 소요사태가 날 법도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영/호남을 뺀 나머지 지역 사람들은 지역의식이 거의 희박하다. 어떤 사회현상을 지역과 결부시켜서 받아들이는 습성이 없는 것이다. 충청도도 원래는 그랬는데 김종필의 핫바지론에 각성을 하고 정신을 차린 후에 공동 정부의 반쪼가리 떡일 망정 나눠서 먹어보고 그 맛을 처음 보고 있는 참이었다. 호남 독주나 패권에 아무 생각이 없는 양같이 순한 백성들이었다. 무의식적이고 습관적이었던 영남 패권주의가 이성적으로 각성되고 의식화된 호남 패권주의로 탈바꿈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7. 김대중 몰락의 시작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초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지역화합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내가 집권하는 동안에는 특정지역이나 대학의 편중현상은 결코 없을 것이다. 믿어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문제는 국민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는 내각과 장차관급 인사가 아니라 실제로 각 분야에서 실무적 힘을 행사하는 자리에 어떤 사람들을 앉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국민회의, 특히 동교동계의 인물 추천은 거의 호남일색이었다. 그런데 일반 국민들이 잘 모르고 있는 해괴한 일은 동교동계가 다투어 추천해 올린 정부기관 내의 호남출신 관료들이 사실 그 전 정권하에서는 가장 김대중과 호남정당에 비협조적이고 배타적이고 적대적이었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정권이 바뀌자 지연 학연 등을 앞세워서 주로 동교동계 사람들에게 줄을 대왔고 과거의 속죄 차원에서 더욱 충성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동교동계는 이런 사람들을 의심하지 않고 김대중에게 천거했다. 사실 과거의 정권하에서 정부기관의 관료들이 출신지역에 따라 反김대중, 反호남 정서를 나타내지는 않았다. 국민회의쪽 사람들이 영남출신 관료들한테 그렇게 개인적 원한이나 감정을 가질만한 사건은 별로 없었다.
사실 가장 反김대중, 反호남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관료들이 사실은 호남출신의 관료들이었다. 이들은 과거에 고향에 들렀을 적에 '김대중은 안 된다'는 소리를 해서 가족과 친지들의 염장을 지르고는 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 후에 가장 재빨리 변신을 해서 호남정권의 특권층으로 둔갑하는 것도 이들이다. 마치 과거에 친일파가 해방 후에 반공정권의 특권층을 형성한 것과 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호남출신 관료들이 공공연하게 反김대중, 反호남 언동을 해온 것은 그들의 살아남기 위한 눈물겨운 호신책이었을 수도 있지만, 이는 엄연하게 "전라도 뒷통수"였다.
그러나 동교동계가 이전에 호남과 야당에 우호적이었던 타지방 출신 관료보다 자기들을 앞장서서 핍박했던 호남출신 관료들을 더 신뢰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두들겨 맞았지만 내 식구가 남보다는 낫다는 그런 심정이었을까? 아니면 그렇게 해서라도 공직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이들에 대한 연민이었을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다 안다는 이해와 관용이었을까? 그것이 전혀 그들의 본심이 아니었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었을까? 아무튼 동교동계는 한 순간에 호남만세를 부르면서 전향한 옛날의 반호남주의자들인 호남인들을 대거 중용했다. 그리고 이들 호남출신 관료는 김대중 정권 내내 때마다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주고 데미지를 입혔다. 김대중 정권은 이들 호남출신 관료들의 실수, 독직과 부패로 해서 무너져 갔다.
김대중 정권의 몰락 과정을 보면 전라도 기질이 혹시 실재하는 것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그만큼 김대중 대통령은 동교동계의 추천으로 발탁한 호남관료들에게 뒤통수를 많이 맞았다. 뒤통수뿐만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이들의 과잉충성과 자질부족으로 이중삼중의 타격을 받았다. 김대중은 믿었던 호남인들에게 연속타를 얻어맞고 몰렸다가 바야흐로 김정일에게 뒷통수를 맞고 주저앉었다. 노무현은 자신이 심판인지, 선수인지, 코치인지 헷갈려서 링 위에서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카운터를 해야 하나? 수건을 던져야 하나? 김대중을 안아서 일으켜야 하나? 리턴매치로 자기가 나서서 싸워야 하나? 분간을 못하고 있었다.

출처:전라도 문제 바로보기 -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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