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의 6.25 참전율 꼴찌는 전라도 지식인들에게도 매우 불편한 진실이었다. 이에 불만이 많았던 언론인 김환태가 국민뉴스에 <한국전쟁 호남장병들은 영웅이었다>는 칼럼을 썼다.
김환태는 1955년 전북 남원 출생이고 인터넷 언론사 브레이크 뉴스의 논설위원이다. <구국전선(1권~6권)>, <해소냐 호남독립이냐>, <육두품 소령의 군대이야기(상,하)> 등 책도 많이 냈다. 그는 이 글을 브레이크뉴스와 인터넷신안신문에도 칼럼으로 올렸다.
전라도 자랑만 하면 될 것을 평소대로 꼭 경상도를 심하게 까는데, 어디 글 써 논 꼴을 좀 보자.
전라도 지식인이란 자들이 경상도 욕을 어떻게 하는지, 다들 잘 봐 두시라는 거다.
전라도 자랑하기- 임부택, 김점곤, 박정모
그는 <동족과의 전쟁에서 용맹을 떨친게 반드시 자랑스런 일은 아니지만> 운운하며 <호남출신이 참전율은 낮았는지 모르지만 전투에 임했을 때마다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고 외친다.
그러면서 전라도 6.25 영웅으로 나주 출신 임부택 중장(6.25 당시 대령), 광주 출신 김점곤 중장(당시 중령), 중앙청에 태극기를 올렸다는 전남 신안 출신 박정모 해병 대령(당시 소위) 셋을 찾아 내서 아주 입이 마르게 자랑한다.
나는 전라도가 자기 자랑하자는 데는 아무런 불만이 없다. 그러든 말든 뭔 상관인가.
다만 김환태의 평소 태도에 비추어 하나만 지적하자면, 그는 박정희가 일본군 장교라며 둘째 가라면 서러워하게 욕을 하는 사람임에도 저 세 분 모두 일본군 출신이라는 점은 입을 싹 닦아 버리고 오직 찬양일색인 게 참 놀랍다는 거다.
김점곤 중장은 관동군 장교였다. 그 스스로 간부후보생으로서 북경에서 1년 반 동안 특수교육을 받았으며 졸업을 할 때 1등이었지만 조선인이어서 수석 자리를 놓쳤다는 말도 했다. 박정모 해병 대령은 일본 다나베 해병단 출신이고, 임부택 장군은 조선인 지원병들을 황국신민의 유능한 군인으로 육성시키는 교관으로 활약한 분이다.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의 <6.25 전쟁 영웅>의 일부인데, 이런 건 다 전라도인이라 괜찮다는 건가? 그렇다면 그가 그런 균형감각을 박정희에게 털끝만큼이라도 발휘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사기, 과장으로 경상도 물어 뜯기
문제가 되는 것은 그가 말하는 것들 중 사실과 다르거나 왜곡해서 경상도 욕을 하는 부분들이다.
(1)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
김환태는 <이승만이 방귀를 뀌면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 온갖 감언아부를 일삼고 이대통령이 부대 시찰시에는 수행하면서 이대통령이 한마디할라치면 감격스런 눈물을 주룩주룩 흘려 지당장관, 눈물장관으로 유명했던 사람이 영남출신 신성모장관>이라고 한다.
참말 경상도를 추하게 똥칠하고 싶어 안달하는 그의 심정이 여실히 읽히지만, 그러나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는 경상도 사람이 아니라 평북 출신의 이익흥씨 이야기다.
(1993년 11월 27일 경향신문)
그는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어째서 지식인이라는 자가 이렇게 상식없이 경상도를 마구잡이로 물어 뜯는 걸까? 지식인이 이러면 전라도 네티즌들이 파다하게 퍼나를 것이 너무나 분명한 일인데, 그가 오히려 그런 사태를 진정 바라는 게 아니라면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신성모장관의 북진운운과 허풍에 놀란 김일성이 선제적 남침을 감행하였을 수 있다는 점에서 신성모는 6.25전쟁발발과 패전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우스꽝스런 주장까지 하는데, 그냥 웃고 넘어 가겠다.
(2) 영남 출신 장군은 있냐?
또한 그는 전라도 출신 임부택, 김점곤 장군을 자랑하며 영남출신 장군이나 변변한 인물이 없다는 냄새를 폴폴 피운다.
ㅎㅎㅎㅎ 그의 글을 읽노라니 그저 나오는 게 헛웃음이다. 전라도 자랑만 하면 될 것을 끝끝내 경상도를 물고 들어가는 꼴이 진짜 가관이지만, 그래 답해 주겠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해병대 사령관으로 해병대를 지휘하여 625 전세를 완전히 뒤집은 신현준 해병 중장은 경북 금릉 출신이다. 유엔군이 수십 차례 실패한 승호리 철교 차단작전과 평양대폭격작전 및 351고지 탈환작전 등을 적의 포화를 뚫고 성공하며 대한민국 공군 최초로 적진 출격 200회를 기록한 유치곤 공군 준장도 경북 달성 출신이다. 개전 이래 최초의 대승을 거두어 적 132명을 포획하고 포 54문과 차량 75대 등 수많은 장비를 노획하며 부대가 대통령 표창을 받고 연대 전 병력 1계급 특진의 신화를 이룬 동락리 전투의 지휘관 김용배(金龍培) 육군 준장은 경북 문경 출신이다.
6.25 개전 직후 서남해안을 완전히 봉쇄하여 적의 해상 침략을 막은 일등공신 박옥규 해군 중장은 부산 출신이고, 진동리 전투와 통영만상륙작전 등 여러 작전을 수차례나 기적적으로 성공시켜 <귀신잡는 해병>이란 신조어를 만들어 낸 김성은 해병 중장은 창원 출신이며, 태극무공훈장을 2회씩 받은 김성은 중장, 신현준 중장 이외에 기타 베티고지의 영웅 김만술 대위, 수도고지의 얼 공해동 육군 하사 등 영남의 참전 영웅들은 한마디로 부지기수란 말이다.
어떻게 참전율 1위를 한 경상도가 오합지졸이고 6.25 전쟁 영웅이 없을 수 있나? 전라도랑 말을 섞으면 꼭 이따위 유치하고 한심한 모양새가 되는데, 그렇다고 상종을 안 할 수도 없으니 진짜 환장할 노릇 아닌가 말이다.
하나 더, 그가 전라도 박정모 소위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했음을 자랑하지만, 1955년 9월 28일자 동아일보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당시 직접 태극기를 게양한 사람은 포항출신의 양병수 일등병조(선임하사)였으며 최국방, 정영검 견습수병이 이를 보조했다는 점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중앙청 태극기 게양 사진은 박정모와 최국방이지만 이건 1954년도에 서울수복 기념으로 재연한 사진일 뿐이다. 당시 인터뷰 내용을 보면 박정모 소위가 지시를 했고 양병수, 최국방, 정영검이 중앙청으로 달려가 직접 태극기를 달았다고 한다. 이 일로 양병수와 최국방이 훈장을 받은 거다.
참전율 꼴찌한 지역민은 제발 말되는 소릴 하든가, 그렇지 못하면 좀 자중해 주시면 심히 고마울 따름이겠다.
(3) 다부동전투로 호남장병들이 영남을 지켰다?
그가 하는 참말 웃기는 소리가 또 있다.
<1사단은 호남에서 출발한 관계로 사단병력 거의가 호남출신 장병이었다. 대구, 영남을 지키기 위해 호남장병들이 피를 흘린 것이다… 사실 영남의 대구 이남지역이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 가족의 인명과 재산을 보호하여 오늘날 지배세력으로 군림하게 된 바탕을 마련하고 전쟁중 왕성한 사업활동으로 한국 유수의 재벌이 된 삼성, 엘지, 지에스, 한일 등이 누구 덕분이던가. 다부동 대승으로 대구를 사수한 호남장병, 수도권, 충청등 비영남 지역 장병들이 낙동강 방어전투에서 목숨을 바친 때문이었다>
웃으라고 쓴 건지 울라는 써 놓은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삼성이 있는 것도 전라도 병사 덕이고 삼성, 엘지는 전쟁 중 그 무슨 왕성한 사업활동을 했단다. 같잖아도 너무 같잖아서 내가 참말 뒤집어 지겠다.
그는 1사단이 호남에서 출발해서 <사단 병력 거의가 호남병력>이라는데 1사단 전진부대 역사를 찾아 보니 서울 남산동에서 1947년 전군 최초로 창설되었다고 나올 뿐 언제 전라도와 관련이 있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뭐 근거를 좀 밝혀 놓고 말을 하면 참 좋을 텐데 그는 전혀 그러질 않는다.
그러나 전후 상황이 어찌되었건, 다부동전투는 대부분 경상도 병력으로 치르고 승리를 일구었음이 아래를 보면 분명하다.
원래 625 초기에 1사단은 서울 서북방 지역을 방어하던 사단이었다. 사단장은 백선엽. 그러나 한강 도하 당시 모든 무기를 한강 이북에 버리고 내려 온 관계로 그저 사단 명맥만 유지한데 불과했다. 나중에 병력과 무기를 보충하고 전투사단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50년 7월 경상도 상주에 온 이후였다. 다부동전투 당시 병력은 거의 대부분이 경상도 병력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낙동강선 방어작전>;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다부동 전투는 1950년 8월1일부터 9월24일까지 55일간 대구 서북쪽 22km의 칠곡군 다부리에서 피아간 3만에 가까운 사상자를 낸 격전이었다.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의 주력 3개 사단에 맞서 국군 1사단과 미군 제1기병 사단이 주축이 되어 처절한 혈투를 벌였다.
그러나 전투가 워낙 격렬하다 보니 하룻밤 지나고 나면 병력의 30~40%가 손실되는 지경이었다. 부족한 병력은 대구, 경북의 청년과 학도병들로 보충되었다.
(<낙동강선 방어작전>;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사정이 이런 형편인데도 1사단이 거의가 호남 병력이고, 그래서 전라도가 경상도를 지킨 것이며, 전라도 덕분에 삼성 엘지도 있는 것이라 떠드는 게 도대체 말이 될 수 있는 일인가? 뻔뻔해도 이런 뻔뻔한 소리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게다가 낙동강 방어 전투는 다부동전투 뿐만도 아니었다.
의성·보현산전투, 기계·안강전투, 신녕전투, 영덕·포항전투, 영천전투 등등 혈투에 모두 누가 자원해서 목숨바쳐 싸웠다는 말인가?
김환태씨 말처럼 진짜 전라도 덕분에 삼성도 있고 엘지도 있었다고 봐야 하나?
모르겠다. 진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만 전라도가 참전율만은 전국 꼴찌를 했을 뿐이란 것인지.
내 글을 표절한 김환태
그의 글에는 또다른 큰 문제가 있다.
그는 이 논설의 앞 부분에 이렇게 쓰고 있다.
김환태는 이 글을 2010년 6월 25일에 올렸다.
아래는 내가 2009년 7월 23일에 내 다음 블로그에 올린 글이다.
아래 내 글 중 푸르게 표시된 부분은 김환태의 글과 정확히 일치한다. 비교해 보시라.
[다음은 <한국의 사회발전:변혁운동과 지역주의>(유석춘 저)에 실린 논문의 일부이다. 논문의 제목은"한국전쟁과 남한사회의 구조화(유석춘,이우영,장덕진 공저; 1990년)이다.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유석춘은 625 전쟁 당시 지역별 참전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이 있음을 지적한다. 그것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거나 전쟁에 남쪽편으로 참전한 자들의 비율이 지역별로 상당한 차이가 있으며 특히 그 차이는 영호남간에 매우 현저하다는 것이다.
유석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선 영남지역 거주자(41%)와 호남지역 거주자(27%)의 남쪽 참전 비율이 현격하게 달리 나타나고 있다. 나머지 지역 거주자의 남쪽참전 비율은 전체 응답자의 남쪽 참전 비율과 거의 비슷한 35~36%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참전하지 않은 비율은 남쪽참전의 비율과 대략 반대의 경향을 보여준다. 호남거주자(70%)가 가장 높고 영남거주자(55%)가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방당시에 영남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남쪽의 편에서 전쟁에 참여한 비율이 가장 높았고 호남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가장 낮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참전강도의 거주지역별 평균값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동저 126페이지)
참전강도의 거주지역별 평균값이란 전쟁 당시의 소속에 따라 정규 국군(3), 경찰(2), 학도병-반공유격대-자위대(1), 의용군(-1), 공산유격대(-2), 인민군(-3)점의 점수를 부과하여 가중치를 두었을 경우의 평균값을 말한다(동저 121페이지). 위의 표에서 참전강도(평균*으로 표시된 숫자)를 보명 영남이 .3677로서 전국평균인 .3139를 넘어 가장 강력한 수치를 보이며 호남은 .2391로서 전국평균에 크게 못미치는 가장 낮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요약하면 625 당시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자가 전라도는 70.1%인데 반해 경상도는 55.2%에 불과했고(전국 평균은 61.2%), 특히 남쪽편에서 전쟁에 참전하여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린 자의 비율이 경상도는 40.8%로서 전국 최고였던데 반해 전라도는 26.9%로서 전국평균인 35.1%에조차 크게 못미치는 전국 최저비율이었다는 말이다. 또한 남한의 편에서 참전한 참전강도에 있어서도 영남은 전국평균을 훨씬 넘어 가장 높은 수치를 보이지만 호남은 전국에서 가장 낮은 수치를 나타내고 있다.
...... 무엇보다, 유석춘은 영호남의 지역갈등의 원인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이 논문을 썼는데 그는 이러한 625 참전율의 차이가 오늘날 영호남 지역감정의 중요한 원인인 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즉 종전 후 전쟁영웅과 희생자가 가장 많았던 영남이 자연스럽게 권력의 중심으로 등장했던 반면 전국에서 참전자가 가장 적었던 호남은 권력으로부터 배제되는 현상이 벌어지게 되었고, 이러한 권력질서가 30년 가까이 이어지자 마침내 호남이 이에 반발하고 일어난 것이 바로 다름 아닌 '광주민주화운동'이었다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유석춘은 그의 다른 논문 "지역감정의 사회심리학"(위의 저서 137페이지)에서 "광주사태로부터 출발점을 찾을 수 있는 80년대 민주화운동은 기존의 지배질서 즉 영남 중심의 참전세력에 의한 정권의 지속을 거부한 저항운동에 다름아니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글의 순서도 똑 같고, 말 끝만 살짝살짝 바꾸었을 뿐 두 글은 완전히 같은 것이다. 심지어 위 빨간 단어는 오타까지 똑같다. 이건 뭐 짤 없이 내 글을 그냥 긁어다 붙였기 때문에 벌어진 일일 수밖에 없다.
이거 이래도 되는 건가?
언론사에 논설을 기고하신다는 분이, 한 마디 퍼간다는 말도 없이 내 글을 퍼가서는, 어떠한 참고나 인용 표시도 없이, 마치 자기 표현인 것 처럼 칼럼을 쓰고, 이거 이래도 되는 건가?
표절은 법적인 개념은 아니다. 그래서 저작권법에는 이런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표절은 사전적 개념이다. 네이버 백과사전에는 <다른 사람이 창작한 저작물의 일부 또는 전부를 도용하여 사용하여 자신의 창작물인 것처럼 발표하는 것을 말한다. 보통 학문이나 예술의 영역에서 출처를 충분히 밝히지 않고 다른 사람의 저작을 인용하거나 차용하는 행위를 가리키며, 기본적으로는 도덕적·윤리적 문제로 간주하는 경향이 짙다>고 소개하고, 2008년 2월 교육인적자원부가 마련한 논문표절 가이드라인 모형에 따르면 <여섯 단어 이상의 연쇄 표현이 일치하는 경우> 표절로 본다고 한다.
김환태 논설위원은 내 글을 허락 없이 가져갔고, 그냥 자기 표현인 듯 신문사에 올렸다.
그는 내 글을 표절한 것이다.
혹시 그는 저 부분이 그냥 유석춘 교수의 말이라 긁어 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 웃기는 말씀 마시라. 저 글 중에서 내가 유교수의 글을 그대로 인용한 부분은 둘째 문단의 따옴표 부분과 마지막 문단의 따옴표 안의 내용 밖에 없다. 나머지는 모두 내가 그의 논문을 모두 읽은 후에 그 내용을 소화해서 <내 언어와 내 표현, 내 체계와 내 질서로 써 낸> 나의 창작물인 것이다. 이런 표현물은 <저작권법>에서 <2차적저작물(저작권법 제5조)> 또는 <편집저작물(저작권법 제6조)>이라고 불리며 완전한 창작물로 보호된다.
물론 나는 블로그의 글을 일반적으로 퍼 갈 수 있게 해 두었다. 대한민국사 긍정파에 도움을 주고자 그리 한 것이다. 김환태씨로서는 뭐 이유야 어떻든 내가 퍼갈 수 있게 해 두었으니 퍼 썼다 한들 저작권법 위반은 아니지 않냐고 항변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법적인 부분을 내가 완전히 그리고 정확히는 모르겠으되, 그러나 설사 법적인 문제가 아니라도 그런 것이다. 지식인이 타인의 글을 퍼가서 칼럼에 그냥 갖다 붙이는 건 아무 문제가 아닌가? 일반 네티즌들도 글 퍼가면 예의상 대개 한 마디씩은 하지만 김환태 논설위원은 그러지도 않았으며, 게다가 그가 내 표현물을 칼럼에 아무런 인용표시 없이 온전히 자기 창작물인양 기고를 한 점은 결코 칼럼니스트로서의 도의가 아닌 것이다. 나아가 그는 필경 유상으로 기고했을 것 같은데, 이러면 약간 다른 문제가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저작권법에서도 타인 작품을 이용할 때 유상과 무상의 사용은 달리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원문인 유교수의 논문들도 일일이 확인하지 않고 글을 썼음이 분명할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면서 유석춘 교수에게 해와 달을 같이 할 수 없는 먹물깡패라고까지 격한 욕을 퍼부으니 그것도 웃기는 일이 아닌가.
적어도 그가 내 글을 퍼간 점에 대해 나에게 한 마디 미안하단 소리는 했으면 한다.
어차피 그가 내 블로그를 보기도 하는 거 같으니.
남의 글을 퍼가서 댓가를 받는 칼럼에 이용했다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김환태 논설위원의 자성을 촉구한다.
또한 부디 경상도를 비방할 때 없는 소리까지 하지는 말아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위의 글을 좀 보라.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가 얼마나 있어 보이는가?
윗 글은 내가 늦게 봤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퍼나르고 있었다.
말도 안되는 경상도 비방이 얼마나 많이 퍼졌다는 뜻인가? 지식인이 이래서는 안되는 것이다.
나 역시 김환태의 이딴 부류 말도 안되는 글에 일일이 대꾸하고 대응하는 거,
진짜 하기 싫고 무지 귀찮은 일이란 말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