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3일 일요일

전라도 문제 바로보기 -春

준비해두었던 글들을 이제 공개하겠다. 연작으로 지역감정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겠다.

선거만 했다 하면 90% 이상의 몰표가 쏟아지는 한국의 특수한 정치상황은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될 심각한 문제다. 호남인들은 이런 호남 몰표 현상에 대해 여러 가지 궁색한 변명과 합리화를 하면서 한 편으로는 책임의 전가에 급급한데 호남의 이런 극단적인 지역이기주의적 주장들이 과연 합당한지에 대해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1. 지역별 몰표

선거시 나타나는 지역별 몰표 현상은 호남에서 먼저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영남정권이 장기집권을 위해 선거전략으로 채택한 것이라고 한다. 그 전략의 요체는 선거를 지역대결로 몰고 가서 호남표를 포기하는 대신에 영남의 몰표로써 이긴다는 것이고, 이 계산에는 영남의 인구가 호남보다 많기 때문에 영남의 70%로써 호남의 90%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지역감정에 기반한 선거전략의 실행으로 영남정권은 계속 승리했고 그 과정에서 호남에 대한 차별과 고립이 더욱 심화되었기 때문에 호남은 생존적 차원에서 정당방위적인 몰표를 줄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이다.  즉 호남의 몰표는 영남의 몰표에 대한 반사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일관된 영남책임론이고 호남무죄론이다. 과연 그런지 살펴보자. 

우리나라 선거에서 지역적 표의 집중 현상이 처음으로 나타난 선거는 언제부터일까? 김대중씨가 박정희와 경쟁했던 71년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지역별 지지도 집중현상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 때는 광주가 광역시가 되기 전이니까 호남은 단순히 전북과 전남이었다. 전남에서 박정희 47만 9천표, 김대중 87만 4천표, 전북에서 박정희 30만 8천표, 김대중 53만 5천표였다. 반면 영남은 대구가 광역시가 되기 전이어서 대구/경북, 경남, 그리고 부산의 세 곳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득표율은 대구/경북에서 박정희 133만표, 김대중 41만표였고 부산에서 박정희가 38만표, 김대중이 30만표를 얻었다. 경남은 박정희 89만표, 김대중 31만표였다. 

전체적으로 영남에서 박정희는 72%, 호남에서 김대중은 64%의 득표를 했다. 상대적으로 자기 지역 출신에 대한 지지도는 이때도 영남이 더 높았다. 그러나 실제적인 성격에 있어서 이때까지만 해도 노골적인 전라도 몰표, 경상도 몰표라는 선거 정서는 보이지 않았고 대통령 선거가 지역간 대결 양상으로 치닫지도 않았다. 영남이 박정희의 고향, 호남이 김대중 후보의 고향임을 감안하면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자기 고향 출신 후보에 대한 호감의 표현 정도를 넘지 않았던 것이다. 극히 상식적인 홈그라운드의 이점에 불과했다. 

그 전인 63년도 혁명위원회 의장 박정희와 윤보선 전대통령과의 대결은 역사상 가장 미세한 표차를 보인 선거였는데 두 후보의 표차이는 겨우 15만표에 지나지 않았다. 이때 박정희가 이긴 선거구는 오직 호남과 영남뿐이었고, 서울, 경기, 충청, 강원, 제주에서는 윤보선 전대통령에게 전패했다. 박정희는 겨우 15만표 차이로 이겼는데 이때 호남에서만 박정희는 35만표를 이겼다. 호남은 박정희 승리의 주역이었고 가장 중요한 정치적 텃밭으로 떠올랐다. 지금 호남 사람들은 영남정권, 특히 박정희가 72년 선거에서 김대중한테 신승하고 난 후에 김대중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의 출신지역이고 정치적 기반인 호남을 차별하고 고립시키기 시작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호남은 오히려 박정희의 정치적 기반이 되어준 지역이었고 김대중과의 대결에서도 박정희한테 그런 대로 만족할만한 지지를 보여준 지역이었다. 그리고 미세한 차이로 이긴 것으로는 윤보선과의 대결이 더욱 아슬아슬했다. 때문에 선거 이후에 김대중을 두려워해서 호남을 전략적, 의도적으로 박정희가 고립시켜 나갔고 호남의 지지를 아예 포기하고 영남에만 의존하게 되었다는 호남인들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영남과 비교해 봤을 때 호남에서 박정희가 얻은 득표는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박정희의 중농 정책이 호남인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박정희의 경제개발 과정이 오늘날 호남인들이 한 목소리로 비난하는 것처럼 영남우대/호남차별, 공업우선/농업홀대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박정희의 농업중시는 당시의 농촌사람들한테 진심으로서 전달이 되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측면에서의 호남차별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심정적으로도 그렇게 다가가기 않았던 일이다. 그것은 농업인구가 대부분인 호남사람의 박정희에 대한 호감이 잘 보여주고 있다. 

2. 전라도 기피증

우리가 한가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국민 대중 사이에 급속하게 퍼져 간 전라도 기피 현상은 집권 세력의 출신지를 가지고 성격을 규정하는 훗날의 지역정권론이 태동한 것보다 더 이른 시기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70년대 초,중반 까지만 해도 당시의 박정희 정권을 '영남정권'이라고 칭한 사람은 없었고, 특정 지역인들에 의한 패권정치로 규정하지도 않았다. 정권이나 정치인에 대해서 '영남' 혹은 '호남'이라는 출신지역의 레테르를 붙이는 관행은 80년 이후에 나타난 현상들이다. 

그렇다면 전라도 기피현상, 라도 기질에 대한 혐오는 누구에 의해서,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유포되기 시작했을까? 

지금 호남인들은 라도 기질이라는 것이 영남정권에서 호남을 고립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고 유포시킨 악랄한 정치공작 내지는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교묘한 세뇌공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호남인들은 전혀 라도 기질이라는 것과 상관이 없고, 또 라도 기질로 해서 타지역 사람들한테 척이 진 일도 없는데 소수의 특정인들이 이것을 꾸며내고 만들어서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퍼뜨려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주범은 영남정권과 영남인들이며, 그 발원지 역시 영남지방이라는 것이다. 

비참한 농촌생활을 피해서 이농현상이 일어난 것은 60년대 초반부터였다. 본래 우리나라 사람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기 고향을 크게 벗어날 일이 없는 농경사회의 생활패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유사 이래 처음으로 여러 고장 사람들이 뒤섞이면서 서로 부대끼는 경험을 하게된 것이 6.25 동란이었다. 이때 타지로 흘러 들어온 것은 대개 이북 사람들이었고, 이남 사람들 중에 피난을 내려 온 사람들은 유엔군의 영토 수복에 맞추어서 거의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이런 다수 지역 사람들의 단기간 혼입은 여러 가지 갈등과 마찰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거기서 반드시 드러나는 것이 '텃세'다. 

즉 원래부터 그 곳에서 살던 토박이들의 위세와 유입자들의 위축이다. 그리고 생활 터전이 이미 있는 토박이들과 생존책을 새로이 강구해야 하는 유입자들의 입지의 차이에서 드러나는 지역 기질의 왜곡이 나타나게 된다. 즉 토박이들과 유입자들은 각자의 기질 중에서 특수상황에 필요한 부분만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북 사람들인 경우에 이 기질이 거칠고 사납고 전투적인 면에서 두드러졌다. 평안도 기질, 함경도 기질이 남한의 터줏대감들과 심각한 충돌을 야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6.25가 가져온 지역혼합은 전쟁이라는 절박하고 불가항력적인 천재지변에 따른 타의적인 강제 이주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외지인이면서도 토박이들한테 사양이나 양보 없는 도전이 용인될 수가 있는 분위기였다. 

다시 말하면 소수의 외지인 신세라 해도 죽기살기식의 생존투쟁이 한편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토박이들을 치받아도 '그럴 수도 있는 일' 또는 '오죽했으면'하는 동정적 용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전쟁이라는 특수상황은 이런 혼합을 쉽게 융화되게 만들었고, 이북사람들은 재빨리 타지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반면에 호남은 6.25때 인구의 이동이 거의 없었다. 인민군의 남침시 호남을 경유한 것은 6사단 뿐이었다. 오직 1개 사단의 인민군만이 무인지대를 소풍가듯이 호남을 통과해서 진주, 마산 방면으로 진격했다. 호남에 잔류해서 호남을 행정적으로 통치한 병력이나 후방 행정요원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6.25 때 호남은 인민군의 지배를 받았다기보다 인민군이 한번 스쳐 지나간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속성상 농촌 사람들은 피난에 소극적이다. 후방으로(가봐야 부산뿐이지만) 피난을 간다해서 뾰족한 수가 없고, 최소한 농촌에서는 굶지는 않는다는 보장이 있기 때문에 호남인들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6.25 전쟁 동안 대구, 부산을 낀 좁은 낙동강 지역에 전국 사람들이 몰려들어 뒤섞인 가운데 서로 치열하게 부대끼던 그 시기를 호남은 홀로 조용하게 넘긴 셈이었고, 이때 타지방 사람과의 혼합 체험을 가질 수가 없었다. 

반면에 이북사람들을 포함해서 서울, 경기, 충청, 강원도 사람들은 피난생활을 통해 서로를 접촉하고 부대낀 소중한 체험을 이미 해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서로 간에 성질과 속성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었다. 부산넘 뱃놈성질은 어떻고, 평안도 아바이는 어떻고, 강원도 감자바우는 어떠하다가 대충 드러났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하와이 깽깽이의 정체는 이때까지는 베일에 쌓여 있었다. 호남만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산업화의 초창기에 이번에는 모든 지방이 다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데 유독 호남만 대규모로 보따리를 싸게 되었다. 산업화에 따른 이농의 주무대가 호남이 된 것이다. 6.25때는 영남만 빼고 전국민이 움직여 다녔지만 60년대에는 전국 대다수가 제자리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있는데 호남인들로 대표되는 농민들이 집에 불난 사람들처럼 쫓아다니게 된 것이다. 

이건 필연적으로 소수의 외지인으로서 가는 곳마다 토박이들의 텃세를 각오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6.25때 처럼 전국이 한꺼번에 강제로 움직인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남으로 피난내려 온 이북사람들이 타지에서 누릴 수 있었던 땡깡과 곤조, 앵겨들기가 받아들여질 수가 없었다. 그들은 소수자, 무산자, 하층계급으로서 하나 둘씩 밤열차의 삼등칸에서 낯설은 타향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타지에 온 유입자로서는 처음으로 어떤 특권도 갖지 못한, 소수 약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라도 기질이 과거의 이북 사람 기질보다 심각하고 끈질긴 만성질환으로 착근하게 된 것은 이런 사정의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유대인들이 타국에 떠돌면서 받았던 질시와 냉대의 원인이 된 유대인기질이나 유럽 각국에서 천대받았던 집시들의 집시근성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전라도 기질의 본질이 무엇이던지 간에 그것은 타지에 흘러 들어온 외지인이 현지인들로부터 배척받게 마련인 소수 근성인 것이다. 다수의 성질과는 이질적인 소수 그룹의 속성은 주류인 다수로부터 배척받게 마련이고 그것에는 '비정상, 불량, 열등'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전라도 기질의 실체는 이런 사회적 환경 속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특정 지역 사람, 특정 정치 세력의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조작의 산물이라고 왜곡하여 주장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이 땅에 새로운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3. 전라도고참

6.25 동란의 피난생활이라는 대규모 인구 혼합의 체험을 통하여 호남을 제외한 전국이 현지인과 외지인이 어느 정도 뒤섞인 채 안정을 이룬 상태가 되었다. 즉 순수한 증류수가 아니라 여러 가지 불순물이 뒤섞인 상태의 안정이었다. 유독 호남만이 클린한 상태의 순수한 호남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후 한국은 어느 지방 사람이 어느 지방을 가더라도 외지 또는 타향이라는 이질감을 크게 느끼지 않게 되었다. 왜냐 하면 이미 한번 크게 섞인 다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남은 타지인이 들어가면 당장 표가 났다. 호남은 혼혈되지 않은 호남인의 순수한 호남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같은 이유에서 제주도도 그렇다. 제주도는 내지인이 발붙이기가 무척 힘든 곳이다. 타지인의 착근을 용납하지 않으려 한다. 대단히 배타적이고 텃세가 강하다. 그 다음 텃세가 강한 곳이 호남이다. 당연히 이 두 지방은 외지인들과 대량으로 뒤섞여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져온 효과와 영향력은 실로 엄청나다. 호남 배척의 가장 큰 이유로 나는 이것을 꼽는다. 물론 군에서 '전라도 고참'이 하나의 고유명사가 되고 군대 문화의 한가지 특성으로 자리잡은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내가 별도로 설명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이농에 따른 도시로의 인구 유입에 호남인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것, 그리고 호남인들은 전쟁 중에 타지역 사람들이 겪은 혼합의 체험이 없었다는 것, 그리고 타지로의 유입이 개별적이고 소규모적이고 분산된 것으로 진행되어 하나의 집단으로서 힘을 갖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이 시기의 군에서 형성된 '전라도 고참 공포증'이 전국적으로 호남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고착시켰다는 점등이 '전라도 기피 현상'의 주원인이다. 

그리고 라도 기질에 대한 공감과 확산은 그야말로 국민대중 사이에서 자생적으로 자연발생적으로 퍼져 나갔고, 여기에는 어떤 인위적이고 정치적인 그리고 행정적인 배경이나 주체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영남인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어떤 증거나 정황도 발견할 수가 없다. 전라도 기피현상과 라도 기질에 대한 배타는 영남에서 먼저 일어난 것도 아니고, 영남에서만 있었던 현상도 아니다. 그것이 가장 먼저 발생한 것은 증거를 댈 수는 없는 일이지만 시기적 순서로 제일 빠르기는 서울이고, 강도로써 제일 강하기는 충청도였다고 대부분 기억하고 있다. 

실제로 영남은 전라도 기피 현상이 그리 심하지 않은 지역이다. 그리고 호남사람들한테 이야기를 들어봐도 타지 생활에서 전라도사람이기 때문에 겪은 차별이나 설움이 영남이 제일 심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내가 이 글의 제목을 '지역 감정 바로 보기'나 '영호남 갈등 문제' 또는 '동서 화합 문제'라고 붙이지 않고 '호남 문제'라고 결정한 것은 결코 영남과 호남 사이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고, 영남인이 주도적인 역할을 해 온 일도 아니기 때문이고, 이건 호남과 호남을 제외한 전 대한민국의 문제이기 때문에 '호남 문제'라는 것이 가장 본질에가깝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전라도 차별이나 호남 기피는 영남이 주도한 것이 아니며, 영남에서 제일 먼저 시작된 것도 아니고, 영남에서 제일 극심했던 것도 아니고, 영남 정권이나 영남출신 대통령과도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라는 것. 이것을 우선 밝혀 놓고 다음 이야기를 하기로 한다. 

4. 김대중과 전라도

대통령 선거가 아닌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지역 몰표 현상이 나타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87년 김대중이 미국에서 돌아와 평민당을 창당하기 전에는 대한민국에 특정 지역을 대표하는 정당이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평민당이란 지역 정당이 출현하기 전인 87년까지 있었던 일곱 번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호남에서 여당이 진 적이 없었다.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호남에서도 집권당은 항상 과반수 이상을 당선시켰다. 호남에서의 여당 당선율은 전국의 평균율에서 과히 벗어나지 않았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김대중의 평민당 출현 이전에는 선거에서의 지역감정에 의한 몰표라는 것이 있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선거에 지역감정을 이용한다거나 유권자들이 지역감정에만 매달린 맹목적이고 무조건이고 감정적인 투표를 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때문에 과거 선거에서의 투표 형태나 정당별, 지역별 득표율로 볼 때에 한국의 정치역학 관계에 지역감정이라는 것이 결정적인 변수로 등장하게 된 최초의 계기는 바로 김대중의 평민당 창당에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평민당은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로 등장한 지역 정당이었다. 왜 평민당이 만들어질 때부터 지역정당이며 순전한 호남정당에 지나지 않았느냐 하면 창당의 목적이 김대중의 출마를 위한 것이었고 그 토대는 바로 호남의 무조건적인 지지를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김대중은 호남의 무조건적 맹목적 지지라는 특수 조건 한가지를 보고 대통령 출마를 결심했고, 평민당을 만들었기 때문에 평민당에 끌어올 수 있었던 대부분의 지지세력이 오직 호남인들 뿐이었다. 김대중이 새로 만든 평민당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거나 김대중의 출마에 반대하는 호남 출신의 정치인은 그것으로 정치생명이 끝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호남출신의 국회의원 또는 정치 지망생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김대중이 호남출신 정치인들의 생사여탈지권을 가질만큼 원래 카리스마가 강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87년의 김대중에게는 호남출신의 국회의원들을 죽이고 살릴 정도의 힘이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7년전에 있었던 광주사태였다. 광주사태를 통해 응축된 호남의 한이 김대중에게 기대와 희망으로 집중된 탓이고 이것은 거의 신앙적인 염원이 되어 있었다. 이런 한의 상징으로서의 김대중의 행보에 방해가 되거나 협조하지 않는 인물은 호남에서 용납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그러한 정서가 전국적으로 공유되지 못하고 오직 호남인들에게만 통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김대중을 통한 염원의 실현 - 호남 차별과 전라도 기피의 설움을 해소하는 것 - 은 전라도인만의 비원이었지 타 지방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정서적 합일이나 공감대가 없는 것이었다. 

산업화 과정에서 자연발생적으로(거의 불가피하게) 확산된 전라도 혐오증과 광주사태로 응축된 호남인의 한을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달성하는 자산으로 확보하여 철저하게 이용한 끝에 결국 목적을 달성한 사람이 김대중이다. 그러나 그는 그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그가 했던 약속들을 하나도 지키지 않았다. 그는 호남의 한을 풀어주지도 않았고, 당선만 되면 1년 안에 해결하겠다고 큰소리 쳤던 지역감정 문제, 동서갈등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않았다.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돌이킬 수 없이 악화시키고 심화시켜서 이제는 해결이 불가능한 망국적 병폐로 만들어놓고야 말았다. 

김대중은 호남을 철저하고 이용하고 잔인하게 배신했다. 김대중은 호남의 공적이다. 

5. 김대중을 바라보는 호남인들의 이중잣대

2002년 12월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호남인들은 부산 사나이 노무현을 95%라는 나와서는 안 되는 지지율로 당선을 시켰다. 이회창은 1%에서 2% 사이를 밑돌았다. 노무현과 이회창이란 두 후보의 인물 차이가 과연 95 : 1이나 되는 것이 정상이냐 라는 질문에 대부분의 호남인들 대답이(물론 네티즌들의 글에 의한 거지만) 이회창이 문제가 아니라 한나라당이란 정당에 모여있는 사람들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즉 광주의 주범들, 학살자들, 그리고 과거의 부정부패 정권의 인물들이 그대로 모여있는 정당이 한나라당인데 단 한표인들 지지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었다. 오히려 1%라도 이회창 찍은 넘들이 나왔다는 사실에 분개한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의 전신은 신한국당이다. 신한국당의 전신은 민자당이고 민자당은 알다시피 민정당과의 3당 합당으로 탄생한 정당이다. 그러니까 한나라당은 과거 박정희 세력부터 전두환 노태우의 신군부 세력에 김영삼의 민주화 세력이 혼혈된 짬뽕국물당이다. 그런데 이 짬뽕국물당 소속의 박계동의원이 1995년에 노태우의 비자금을 폭로했다. 물론 이런 폭로가 김영삼의 내락이 없이 가능한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하면 박의원의 비자금 폭로는 광주사태의 두 수괴에 대한 김영삼의 처벌의지가 드러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518특별법을 제정한 문민정부는 96년 2월에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광주사태 관련자 16명을 내란 및 반란혐의로 기소해서 28차례의 공판을 거듭한 끝에 1심 재판부는 전두환 사형, 노태우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엄청난 일을 해낸 것이다. 이어진 항소심에서 전두환 무기징역, 노태우 징역 17년의 확정선고가 내려졌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감방에 들어갔다. 

광주사태의 희생자들과 호남인의 복수는 영남정권의 영남대통령이라고 호남인들이 그토록 욕을 해댄 김영삼과 단 1%의 지지도 용납할 수 없다는 정당이 주도하여 이루어낸 것이다. 누구도 전두환, 노태우를 법정에 끌어내서 사형, 무기징역의 선고를 받게 하고, 무기징역, 17년 징역의 확정판결을 끌어내서 진짜로 감방에 처넣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김영삼과 민자당은 해냈다. 성공한 쿠테타를 처벌한 세계 정치사 초유의 일을 해낸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부족해서, 성에 안차서 그 정도로는 1%의 지지도 아직 보낼 수 없다고 하면 그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95%의 지지를 보낸 정당, 새천년민주당이 무엇을 했는가 보자. 그 정당의 창설자이고 오너이고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은 대통령에 출마하자마자 전노 사면을 떠들고 나왔다. 97년 5월이다. 이것은 이회창 후보의 지지층을 흔들기 위한 김대중의 선수였다. 할 수 없이 표를 지키기 위한 교육지책으로 이회창도 9월에는 전노 사면 쪽으로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영삼은 이회창의 사면제의를 한마디로 거부했다. 이회창으로서는 쓴잔이었다. 도대체 광주 사태의 한을 풀어야 하는 사람이 누군 지를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영남출신 대통령 김영삼이 독한 마음을 묵고, 숱하게 정적들을 만들면서, 온갖 역풍을 뒤집어쓰면서 집어넣은 두 학살범을 김대중은 단순한 선거전략 차원에서 무위로 돌리려고 들었다. 

더욱 신기한 것은 이에 대해 호남인들 누구도 항의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김대중은 당선되자마자 당선자 신분으로 김영삼대통령에게 전노 사면을 정식으로 요구했고 김영삼은 두 사람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은 766일, 노태우는 783일 동안 콩밥을 먹다가 나왔다. 두사람이 전직대통령 신분으로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식장에 당당하게 참석한 것은 물론이다. 호남사람들은 그 장면을 보면서 피를 토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호남인들은 전노가 전직대통령으로 폼을 잡고 단상을 장식한 그 취임식에 박수치기 바빴다. 피를 토하기는커녕 기뻐 춤을 추었다. 우리들은 그것으로써 호남인들이 전노를 용서한 줄 알았다. 김대중의 전노 용서와 학살 세력에 대한 화해를 추인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5년이나 지난 2002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호남인들은 광주사태의 관련자들이 있는 정당이어서 한나라당은 1%의 지지도 해줄 수 없노라 한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만약에 그런 이유로 한나라당은 1%도 지지할 수 없다면 김대중은 호남사람들한테 맞아죽어야 정상이다. 그리고 새천년민주당 후보는 단 한표도 얻으면 안 된다. 한나라당이 까막소에 집어넣은 전노를 풀어주고 대접해 주고, 법원이 선고한 벌금도 안 받으면서 온갖 편의를 제공하고 보호해주고 돌봐준 정당이 새천년민주당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의 정치와 호남인들을 보면 내 정신까지 혼미해진다. 나는 도저히 이해불가능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광주 사태 관련하여 호남인들이 보인 이중성에 대해 쓰려면 글이 길어지므로 후술하겠다.

6. 전라도와 이념문제 

김대중이 호남의 상징, 호남의 수호신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은 데는 젊은 층, 특히 대학생들의 지지와 김대중 우상화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유신 시대에 대학의 반독재투쟁, 유신철폐 운동은 부마사태가 보여주듯이 영남이 더 강렬했다. 각 대학 학생회는 민주화 운동의 본부였다. 다만 호남의 대학이 타지방과 달랐던 점은 학생회 지도부가 주사파, NL등 북한과 연계된 좌익 일색이었다는 점이고 학생운동의 좌경화가 전국에서 가장 빠르고 또 광범위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일반인 사회에도 파급되어 호남의 좌경화는 호남의 대표 정치인 김대중의 모호한 색깔과 시너지효과를 내면서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북한의 통일전선 전략의 중요한 포인트인 '해방구 확보'가 거의 성공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공산주의의 침투는 민주 사회 내의 가장 소외받고 설움받는 계급에 대한 선동에서 시작되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북한의 입장에서 볼 때 당시 대한민국 내에서 가장 이념적으로 취약한 지방이 바로 호남이었다. 그래서 호남을 집중적인 공략의 대상으로 삼았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차적으로 감동받기 쉽고, 순진하며, 열정적인 세대인 대학생들을 상대로 이루어졌고 상당한 효과를 보게 되었다.  

호남이 쉽고 빠르게 좌경화되어 간 데는 세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첫 번째는 호남 차별, 전국적인 전라도 혐오증, 그리고 경제적 낙후 등이 요인이 되어 호남전체가 소외계층, 피압박계층으로 하나의 하층계급을 이루고 있었다는 점이다. 원래 공산주의는 계급적 투쟁이 그 철학적 토대이고 운동의 모티브이다. 호남이라는 거대한 하층 계급은 공산주의자들이 공략하기에 너무나 알맞은 대상이었다.  두 번째는 대한민국에서 호남이 가장 반공의식이 약한 지역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이유가 있다. 호남을 제외한 타지방의 반공의식이 어디에 근원을 두고 있는지 보면 된다. 타지방에는 있는 반공의 당위성이 호남에는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것이 뭐냐면 바로 공산주의에 의한 직접적이고 격심한 피해의 체험을 호남은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일부 철없는 대학생들이나 호남인들은 한국인의 반공주의가 군부독재정권의 교육의 결과라고 말한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수꼴들이 오랫동안 국민을 세뇌시켜 온 탓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건 천만의 말씀이다. 한국인의 반공은 6.25동란이라는 참혹한 전쟁에서 겪은 직접적인 체험에 기반한 것이다. 6.25 때 인민군의 직접적인 공격 루트가 되었던 서울 부산 축선의 모든 지역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적치하라는 공산통치를 맛보았고 대부분의 인민군 점령지역에서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다. 

이것은 반공교육에서 날조한 일들이 아니라 사실이 그러했다. 민간인들에 대한 잔인하고 대규모적인 학살과 대량납북은 훗날 킬링필드의 예고편이나 다름없었다. 남침 전에 북한의 김일성이 작성했던 통일 후의 학살 계획서도 이미 공개된 자료이다. 밝혀진 중국측 자료에 의해서도 전쟁 중에 중국을 방문한 김일성에게 모택동이 남한에서 저지른 양민학살을 질책하는 대목이 있다. 인민을 그렇게 살해하고 어떻게 통일과업에서 인민의 지지를 기대할 수 있겠느냐고 모택동이 말한 김-모 면담 자료가 최근에 중국에서 공개되었다. 

인천상륙 작전 이후 낙동강 전선에서 싸우던 인민군이 북으로 패주하면서 그 패주경로상에 있던 대부분의 지역에 혹심한 피해를 입혔고, 북으로 탈출하지 못한 병력은 지리산일대에 빨치산으로 숨어들면서 또한 극심한 보투민폐를 입혔다. 강원도는 중공군 개입 후에 격전지가 되고 역시 유격전의 무대가 되면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체험하게 된 땅이 되었다. 그런데 유독 호남만은 이 처참했던 6.25에서 무풍지대였다. 김일성은 단기전, 속전속결을 가정했기 때문에 장기전에 대비한 곡창지대의 확보라는 전통적인 전략을 도외시하여 호남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로지 관심은 경부 축선 뿐이었다. 그래서 호남은 단 1개 사단만이 경유하여 진주/마산 방면으로 전진시켰을 뿐이고, 후방 관리요원과 행정조직의 투입도 호남까지는 여력이 미치지 않았다. 

인천상륙작전 이후의 패주로에서도 호남은 벗어나 있었다. 그 후의 전쟁 기간 동안에도 호남은 직접적인 전투와는 거의 무관한 태평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유독 호남인들은 6.25 때 일가친척이 빨갱이들한테 학살당했다던가 친지들이 북으로 끌려갔다던가 또는 인민군들한테 재산을 강탈당했다던가 하는 직접적인 피해나 수난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전후에 호남의 대공 경각심과 빨갱이 혐오증이 타지방에 비해 유난히 희미했던 이유라 생각한다. 거기다가 여순 반란 사건의 후유증으로 해서 오히려 남쪽의 경찰에 의해 일가친척이 죽거나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과 지리산의 호남쪽 일대인 남원, 순창, 구례, 곡성 등에는 빨치산 토벌작전시 남한의 군경에 의해 억울한 피해를 입은 사람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개인적인 원한이 북의 공산주의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한내의 정권 쪽을 향하는 심리적 경향이 강하다. 

이런 반공의식에서의 갭이 호남을 타지방들에서 고립시키는 이유로 작용한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이념적으로 호남은 한국 내의 섬이었던 것이다. 이런 호남이 광주사태를 기폭점으로 해서 본격적으로 해방구로 변신해가는 것을 모든 한국인들은 불안하고 우려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아야 했다. 특히 학생들의 좌경적인 운동은 6,25의 직접적 체험을 가진 타지역 국민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이념에 의한 호남의 고립에 대한 이야기는 기니까 천천히 계속하기로 하자.

출처:전라도 문제 바로보기 -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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