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 길어질 듯하여 양해를 구한다. 그림 따윈 없다.
1. 이념에 대한 소고
이념을 위해서 죽는 인간은 없다. 인간은 자기의 목숨을 바칠 정도로 가치 있는 이념을 만들지 못 한다. 만약에 어떤 인간이 목숨을 걸고 싸우다가 죽었다면 그 이유는 이념이 아니라 분노 아니면 욕망의 둘 중 하나이다. 욕심에 눈이 어두워 목숨까지 걸었거나 아니면 분노가 너무 강해 죽어도 좋다는 오기가 발동했을 뿐이다. 이념은 분노를 정당화시키고 확인하는 수단일 뿐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 스스로 어떤 숭고한 이념을 위해 죽는다고 착각을 하고 죽었을 수는 있지만 이럴 경우 그의 진정한 죽음의 동기는 사실 분노다. 그래서 모든 강력한 정치 사상적 운동이나 투쟁은 모두 인간의 분노에 의지한다. 운동의 에너지는 오직 분노에서만 끌어낼 수가 있다. 이념은 분노에 봉사하는 시녀다. 인간이 공산주의를 위해 죽을 수 있는가? 천만에. 인간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자신의 가난한 삶과 자기보다 부유한 사람에 대한 분노 때문에 죽는다. 민주주의를 위해 죽을 수 있는가? 천만에. 독재자들에 대한 분노 때문에 죽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지키기 위해 죽은 사람이 있는가? 아니다.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죽는다.
모든 이념과 미덕과 도덕과 명분은 각 개인의 분노나 이익에 비하면 그야말로 하찮은 고려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애국심, 동포애, 민족주의, 형제애 따위가 다 마찬가지다. 나라? 국가? 그 국가가 자기 가족을 죽이고 자기 재산을 뺏아가고, 자기를 붙잡아다가 고문을 하기라도 한다면 조국이 아니라 원수가 된다. 그런 조국을 패망시킬 수 있다면 양놈이 문제며, 짱깨가 문제일까? 그런 조국을 짓밟을 수만 있다면 어떤 악마와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6.25때 빨갱이들한테 고향을 잃고 형제를 잃고, 남편이나 아들을 잃은 사람들은 반공정책을 확실하게 시행하는 군부독재가 오히려 든든했다. 반면 빨갱이들한테는 피해를 입은 것이 전혀 없는데 안기부나 검찰에 끌려가서 고문이라도 받은 사람은 이런 독재정권을 괴뢰라고 부르는 김정일한테 친근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 공산주의, 주체사상 이런 것들은 사실 어떻게 보면 중요한 것이 못 된다. 중요한 것은 누구로부터 자기의 이익이 침해당했으며, 어떤 상대로부터 자신이나 가족들이 폭행을 당했느냐이다. 이념은 그로부터 시작된 분노를 정당화시켜줄 수 있냐는 것이다. 또한 직접적인 가해자가 누구냐이다,
문제는 대한민국 전체와 호남이 분노를 느끼는 대상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호남사람들이 광주사태의 한과 상처를 계속 떠들어도 마산이나 충청/강원/경기도사람들은 그런가보다 할뿐이다. 물론 광주 학살 사진전이나 꽃잎 같은 영화를 보고는 같이 운다. 동포니까. 동포가 아니라도 같은 인간으로써 운다. 홀로코스트 필름을 보고도 눈물이 나는 건 인간으로서 당연한 거다.
마찬가지로 KAL기 폭파로 죽은 사람들의 유가족 심정은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런가보다로밖에 비춰지지 않을 것이다. 아웅산 테러때 전두환 옆에 섰다가 억울하게 죽은 아까운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죽음이 김정일에 대한 분노로 전이되지 않는 것이다. 이게 자기 일이 아닌 것에 대해 인간이 느끼는 한계다. 나는 미군 장갑차 사건으로 죽은 여중생 영정을 들고 촛불 시위를 해대는 군중들의 마음 속에 정말 죽은 여중생에 대한 아픔이 강하게 배어났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그런 동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십만 군중이 시위에 나온 것은 여중생에 대한 슬픔이 아니라 다른 무엇에 대한 분노 때문이다. 같은 분노를 가진 군중들이 그 사건을 계기로 한자리에 나왔을 뿐이다.
다만 바람직스러운 것은 같은 공동체 구성원들인 경우 분노의 대상이나 지키고자 하는 가치가 동일한 것이다. 그런데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 분노의 대상, 욕심의 가치가 제각각이 되면 그 공동체는 위험하다. 이념과 가치관의 다양성 추구는 필요하고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말했다시피 그런 것은 생존이 보장된 다음에 추구해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생존이 위급한 상황에서 다양성의 추구는 사치일 뿐이다. 우리는 휴전선 북쪽에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거대한 적이 있는 동안에는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 아직까지 다양성은 어느 정도 억제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민족에게 공산주의는 선택 가능한 여러 가지 이념 중의 하나가 아니다. 6.25의 잔혹성은 우리에게 그걸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작금에 북한의 현실과 북한 동포의 삶이 우리에게 늘 각성시켜 주고 있는 일이다.
2. 김대중과 지역감정 1부
지역감정을 '우리가 남이가?' 수준의 즉흥적이고 단발적인 선동 차원이 아니라 하나의 정치전략론으로서, 선거의 패러다임으로서 학문적 차원에서 이론화, 논리화해서 이것으로 선거에 임하고 또 그 결과에 대해 '성공했다'고 자평했던 대한민국 최초의 정치인은 김대중 씨였다. 그에게 이런 지역감정을 정치무기화 하는 이론을 다듬어 제공한 것이 호남 출신 학자들이었다. 이런 지역감정의 정치전략화는 민간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비주체적으로 확대재생산되었던 지역감정촉발 유언비어들과는 그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호남사람들은 악성 유언비어의 유포나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정치적 발언 등을 구실로 지역감정의 심화 책임이 영남에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 역시 사실과 다르다.
지역감정을 정치역학적 선거전략으로 이론화시킨 선구는 95년의 6.27 지방선거를 앞두고 김대중이 선거전략으로 개발한 '지역등권론'이다. 이것이 뚜렷한 주체에 의한 계획적이고 의도적이고 목적적인 지역감정 이용선거의 효시다. 당시 김대중은 민주당의 평당원 신분으로 선거운동을 하면서 전국을 누볐는데 그가 주장한 지역등권론은 '40년 동안 영남정권이 계속됐으니 이제는 호남, 충청, 강원, 제주 지역도 영남과 똑같은 권리를 누릴 자격을 주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지역등권론은 대한민국의 모든 지역이 저마다 지역 이기주의로 무장해서 각기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는 선동이었다.본격적으로 지역감정에 의한 지역간 각축을 조장하고 나선 것이다. 역대의 정부를 '영남정권'이라는 특정 지역적 집권세력으로 왜곡시킨 것도 김대중의 교묘한 수법이었다. 노골적인 지역감정의 부추김이었는데, 이 지역등권론을 그대로 받아서 실천에 옮긴 것이 김종필이었다. 김종필은 김대중의 지역등권론에 충청도 핫바지론을 들고나와 맞바람을 질렀다.
지역등권론은 지방선거에 그대로 폭풍으로 작용했다. 그 결과 김대중의 민주당은 서울 지역 구청장 25개 중에 23개를 석권했고, '충청도 핫바지론'을 들고 나온 자민련은 대전/충남북을 휩쓸었다. 지역감정의 선거 이용은 그만큼 파괴력이 컸다. 6.27지방선거가 끝난 후에 '지역등권론이 지역감정의 악용이라고 그만큼 언론에서 비판을 해댔지만 김대중은 결국 그것으로 우리는 선거에서 이겼다'고 자랑했다. 김종필 역시 지방선거의 승리로 희희낙락했음은 물론이다.
지역감정이 망국적으로 깊어지던, 동서가 원수가 되던 그것보다는 눈앞의 선거에서 이기는 것이 훨씬 중요했던 사람들이다. 지역감정을 선거의 수단으로, 정치의 무기로 노골적으로 서슴없이 활용했던 사람은 김대중이고 열심히 본받아 쫓아간 사람이 김종필이다. 김영삼 씨는 김대중이 '지역등권론'으로 지방선거에서 이기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그의 회고록에 당시의 심정이 잘 나와있다. 속내는 '뭐 이런 놈이 다 있노?'하는 심정이었을 거다. 6.27지방선거에서 지역등권론이 파괴적인 위력을 발휘하자 호남옹호론자들은 대권을 차지하기 위해 지역등권론의 업그레이드 버전을 시장에 내 놓았다. 이것이 이른 바 지역연합론이었다. 김대중은 이 지역연합론에 의지해서 마침내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고 청와대로 들어가게 된다. 김대중과 호남정당은 철저하게 지역감정을 이용하고 오로지 그것에만 힘입어 선거에 이기고 집권에까지 성공했다. 이런 김대중이 지역감정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3. 김대중과 지역감정 2부
95년의 6.27 지방선거에서 지역등권론으로 압승한 김대중은 이에 힘입어 다시 한번 창당을 하게 된다. 이른바 국민회의였다. 그러나 지역등권론에 의한 지방선거 승리는 곧바로 그만큼 역풍과 시련을 몰고 왔다. 87년과 92년의 대선에 이은 95년 지방선거에 이르기까지 선거마다 나타나는 전라도의 몰표, 맹목적이고 광적인 김대중 지지는 다른 지역의 반감과 분노를 야기시켰고 그것은 곧바로 96년 4월의 총선에서 김대중한테 쓰라린 패배를 안겨 줬다. 지역등권론에 대한 좋지 않은 여론의 역풍에 시달린 김대중은 총선에서는 노골적인 지역감정의 이용을 자제해야만 했다.
김대중은 피가 터지도록 100석을 애원했지만 국민이 그에게 준 것은 고작 79석이었다. 김대중의 정치 인생에서 가장 참담하던 시절이었다. 평민당 창당시부터의 괄세와 견제로 독기가 오른 김상현의원이 김대중씨는 이제 끝났다고 공언하고 다닐 정도였다. 김대중은 1년 전의 지방 선거 승리가 꿈만 같았고 그런 승리를 한번 만 더 갖기를 소원했다. 그것을 위해서는 악마와도 악수를 할 각오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 김대중에게 악마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바로 지역감정이라는 악마였다.
김대중 앞에 나타난 사람은 나종일 경희대 교수였다. '지역연합론'을 이론화해서 제공한 사람이다. 그리고 나교수가 이끌던 동아시아 포럼이란 학술단체의 등장이다. 지역연합론은 한마디로 영남으로부터 정권을 뺏아오기 위해서는 다른 명분, 전략, 도의, 노선, 이념 다 필요없고 오직 지역감정에 의한 지역대결에서 대가리 숫자로 이기면 된다는 단순과격, 무지막지한 지역감정 무기화 이론이었다. 이 지역연합론은 '당선'과 '정권교체'라는 목적 외에는 어떤 정치도의, 이념, 노선, 정책도 다 무가치하다는 마키아벨리즘의 정수나 다름없는 논리였다. 그리고 이 지역연합론을 받아들인 김대중의 그 다음 정치 행로는 오로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파렴치한 마키아벨리스트 자체였다.
지역연합론에 의해 대의명분과 이념, 노선은 전혀 고려치 않고 정치와 선거를 오직 대립하고 있는 지역간의 인구수에 의해서만 승부를 짓겠다고 작심한 김대중은 지역연합론자들이 권유하는 바를 쫓아 유신본당을 자처하던 군부독재정권의 주역의 한사람인 김종필과 연합했다. 이른바 국민회의-자민련 연합이다. 전세계 정치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보진공조, 황혼열애, 노추만발이었다. 이 황당무계한 정치 쇼에 다시 한번 언론을 필두로 전국민의 비판여론이 비등하자 김대중과 호남은 김영삼의 3당합당을 방패막이로 내세웠다. 밀실야합이라고 그토록 비난했던 3당합당을 김김연합의 구실로 내세운 것이다. '너거가 했던 나쁜 짓을 나는 안 한다'가 아니라 '너거도 한 짓인데 왜 나만 욕하냐?'였다.
김대중과 호남의 논리는 이성과 상식을 벗어나고 있었다. 이때부터 조중동을 비롯한 메이저 언론들은 김대중을 멸시하기 시작했다.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멸시의 대상으로 바뀐 것이다. 그만큼 김대중의 정치는 밑바닥정치로 전락하고 있었다. 언론들이, 메이저 신문사들이 그만큼 한 정치인을 멸시하게 되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도 호남인들은 그것을 전부 조중동, 특히 조선일보의 책임으로 뒤집어 씌웠다. 그래서 안티조선이라는 비도덕적이고 위선적이며 악랄한 언론 말살책이 가동되기에 이르렀다.
4. 충청도를 이용해먹자
김대중 씨의 논리는 두 개 지역이 연합해서 영남을 대가리 수로 눌러버리면 이길 수 있다는 거였다. 그래서 광주/호남+대전/충청>부산/대구/경남이라는 부등식을 세웠던 것이었다. 이 부등식은 진리였지만 그러나 그 외 지역의 민심이 문제였다. 과연 호남/충청 두 지역의 연합이 영남은 이긴다 치고 타지역의 역풍까지 감당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동아시아 포럼의 쟁쟁한 호남 학자들도 자신있게 확언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김대중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87년 평민당의 창당과 대통령 출마강행이라는 원죄는 대한민국의 정치판을 지역대결로 고착시켰고, 그 결과 자기가 만든 지역대결의 덫에 걸려 옴짝달싹을 못할 처지였다. 호남의 광적인 지지는 확보를 했지만 그 대가로 타지역의 비토를 불러왔고, 호남의 인구수가 영남보다 많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김대중의 한이었다. 호남 인구가 영남만 같았어도 지역대결 구도는 김대중에게 꽃놀이패가 될 수 잇는 반상 운영의 전략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인구숫자가 안 따라주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니 호남만 가지고는 안 되니까 충청도하고 합해갖고 인구 숫자를 맞추자 이런 계산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사람들이 전부 바볼까? 그런 추악한 정치놀음과 더러운 계산에 넘어가 줄까? 안 될 얘기였다. 그런 짓으로 대가리 숫자를 불려도 그보다 더 많은 대가리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그게 먹혔다. 바로 이인제라는 돌발변수 때문이었다.
5. 민주화의 죽음
96년 총선에서 패배한 뒤에 두문불출하던 이강래특보가 거의 열흘동안을 이불을 뒤집어쓰고 끙끙거린 끝에 제갈량의 천하삼분론을 능가하는 형세반전, 기사회생, 백척간두 필사즉생의 묘안을 만들어 김대중한테 보고서를 올리게 된다. 이 보고서의 핵심이 바로 'DJP 연합만이 우리의 살길입니다, 폐하. 통촉하시옵소서.'라는 것이었다. 나교수의 지역연합론을 바탕으로 한 구체적인 실천방안의 그림이 올라온 것이었다. 이강래특보는 그후 DJP연합의 산파 역할을 해내게 된다. 물론 박지원기획실장도 빠질 수 없었다.
국민회의-자민련 후보단일화(물론 김대중으로의 단일화)와 내각제 개헌을 맞교환 한다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기상천외한 망발이었다. 김대중 한사람의 당선을 위해서 국가의 토대인 정체를 바꿀 수 있다는 야욕을 서슴없이 드러낸 것이다. 나라의 운명도, 조국의 미래도, 국가의 안보도 안중에 없이 오로지 당선에 눈이 뒤집힌 욕망의 화신, 그것이 당시 김대중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김대중의 당선 외에는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집단적 광기가 한반도 서남부를 짓눌렀다. 공포스러운 엽기였다. 그리고 그 엽기적 광기는 2002년의 대선에까지 이어졌고, 앞으로 언제까지 더 이 나라를 옥죄일지 알 수 없다.
지역연합론과 그것의 구체적 실천방안인 DJP연합은 제일 먼저 민주당 내의 민주화세력으로부터 격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심지어 한겨레도 격렬하게 비판을 하고 나섰다. 김대중은 국민회의 소속의 의원들을 하나하나 붙잡고 하소연을 하고 호소를 하고 애원을 하고 다녀야 했다. "내가 한번 잡는 길은 그것뿐인데 난들 어쩌겠는가" 김대중의 읍소에 민주화 세력은 하나 하나 명분과 기개를 접었다. 민주화 세력 스스로 지난 세월의 자기를 부정하는 순간이었다.
김영삼의 3당합당과 김대중의 DJP연합에 의해 이 땅의 민주화 세력은 철처하고 비참하게 무너져 버렸다. 3당합당을 가져오게 된 이유가 김대중의 출마욕심에 의한 평민당 창당에 있었음을 생각해보면 이 땅의 민주화 세력을 말살하고 장례를 치르고 관에 못질까지 한사람은 바로 김대중 한사람이었다. 그 한사람의 욕망 때문에 대한민국 정치의 모든 가치와 이념과 덕목이 다 무너져갔다. 김영삼의 3당합당에는 발끈하여 반대했던 노무현이 국민회의 내의 다수 민주화 동지들이 그토록 반발했던 DJP연합에는 양처럼 온순하게 순종했던 일은 이해불가능한 하나의 미스테리였지만 오늘에 와서 그것이 노무현의 웅대한 대권전략이었음을 인정하면 노무현을 한국삼국지의 사마의로 비견하는데 어찌 인색하겠는가? 아! 대륙과 장강의 수많은 영웅호걸이여, 고작 사마씨의 천하를 위해 외로이 들판에 누웠는가?하고 노래했던 정팔의 시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나 언론들은 이런 야합과 야바위 수준으로 전락한 정치를 용서하지 않았다. 조중동은 혹독하게 김대중을 다루었다. 언론의 당연한 책무였다. 그러나 초기에 단호했던 한겨레는 역시 김대중의 하소연 앞에 펜을 꺾고야 만다. 그 후부터 한겨레는 언론이 아니라 김대중과 호남정당의 홍보찌라시로 전락하고 만다. 메이저 언론사들과 김대중은 서로 만날 기약 없는 이별의 정거장에서 등을 돌렸다. 이들에게 김대중은 멸시와 조소의 대상으로 변하고 있었다. 분노의 대상은 용서할 수가 있지만 멸시의 대상은 그 다음 방법이 없는 법이다. 언론과 김대중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굳어져 갔다. 자기에게 화를 내는 상대에게는 화해를 청할 수가 있지만 멸시하는 상대는 죽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훗날 안티조선 운동과 김대중 정권에 의한 언론사 세무조사라는 폭력적 보복으로 나타나게 된다.
6. 현재까지 제시한 의견들을 정리하며 주석을 붙인다.
애초에 전라도 혐오증으로 말해지기도 하는 호남 차별 현상은 산업화에 따른 단방향의 인구 이동이 가져온 바람직스럽지 못한 자연발생적 사회현상이었다. 이것은 정치나 선거와는 무관한 것이었고 누구도 계획하거나 의도하거나 조장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것의 전파도 상품에 대한 입선전과 같이 불특정 다수에 의한 비동기적인 것이었지 그것에는 어떤 감지할 수 있는 실체적인 매체나 미디어, 단체, 주동세력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산업화와 격급한 사회변동에 따른 일시적 성격의 현상이었고, 산업화의 효과와 경제성장의 혜택이 고르게 나타날 시점에는 소득과 교육수준의 평준화에 따라 자연소멸될 성질의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대단히 위험하고 심각하며 악질적인 사회문제로 변질된 계기는 1차적으로 광주사태였다. 광주사태가 지역감정이나 호남차별과 결합됨으로써 호남인들에게 한으로 굳어져 버린 탓이다. 이 과정에는 광주사태를 무력으로 잔인하게 진압한 군부에 1차적 책임이 있는 한편, '영남군인이 호남인을 학살했다', '광주였기 때문에 당했다'와 같은 그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피해의식에 강하게 호소하는 유언비어들을 퍼뜨린 일단의 사람들한테도 분명히 책임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지역 감정을 부추기고 심화시키는 각종의 유언비어들은 그 동안 영남과 호남에서 각기 생산되어 유포된 바이지만 이런 것들은 광주 사태 당시의 유언비어들처럼 최초의 창작자와 유포자를 비롯한 뚜렷한 실체의 파악이 불가능하다. 하나의 소문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정치의 지역대결 구도를 어떤 주체가 확실한 정치적 행위로서 실제적으로 고착시킨 최초의 사건은 분명히 존재한다. 바로 87년의 평민당 창당과 김대중의 출마다. 그리고 뚜렷한 실체와 주동세력, 단체가 확인되고 의지와 계획,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이론과 논리까지로 무장된 형태로 지역감정이 부추겨지고 고무된 것은 오로지 김대중과 호남정당에 의해서만이였다. 그것이 1차로 나타난 것이 95년 지방선거의 전략으로 나온 '지역등권론'이고, 2차로 더욱 강화된 것이 97년 대선의 전략으로 등장한 '지역연합론'이었다.
자연발생적인 지역간 정서적 갈등이나 특정지역의 이지메가 아니라 정치세력에 의한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지역감정의 고착과 유발, 심화의 행위는 대부분 김대중과 호남정당에 의해 저질러졌고, 그 이론적 토대 역시 호남을 옹호하던 지식층들이 제공했다는 점이다. 사실이 이럴진데 대한민국의 지역 감정 문제에 책임이 누구에게 있으며 원인의 제공자가 누구인지는 자명하지 않겠는가?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 후의 지역감정은 다음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출처:전라도 문제 바로보기 -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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